[기획연재10]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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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4-28 16:24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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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연구소 신은섭 객원연구원 4월 15일 서울
북한은 올해 1월 조선노동당 제8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 탄생 110돌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탄생 80돌을 “승리와 영광의 대축전”으로 “성대히 경축”하겠다고 하였다. 통일의 상대방인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에 대해 우리도 학술적으로 자세히 연구하는 게 통일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자주시보와 주권연구소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기획연재를 10회에 걸쳐 준비하였다.
10.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사업
김일성 주석의 통일사업
7.4공동성명
남북은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이 담겨 있다.
김일성 주석이 어떤 뜻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는지 남북공동성명 발표문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남북공동성명 발표문에는 “쌍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하루빨리 가져와야 한다는 공통된 염원을 안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라고 나와있다.
김일성 주석은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성과를 이후 조국통일 사업으로 이어가려 한 것 같다. 김일성 주석이 1980년, 1993년에 각각 내놓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에 조국통일 3대 원칙이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1945년 분단 이후 27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정부가 조국통일 문제에 관한 합의를 내왔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남북이 공동성명에서 조국통일의 3대 원칙을 내옴으로써 남측의 민간 통일 운동이 한층 탄력을 받았으며, 전체 민족이 통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상 곽동기, 「2. 북한의 조국통일 3대 원칙 분석」, 자주시보, 2015.10.28. 참조)
고려연방제통일방안
김일성 주석은 198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제시하였다. 남과 북에 자본주의, 사회주의의 다른 두 제도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한 조건에서 연방 형식의 통일 국가를 건설하자는 제안이었다. 이것이 집약된 표현이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이다.
이와 관련해 김일성 주석은 1991년 신년사에서 “북과 남에 서로 다른 두 제도가 존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실정에서 조국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구에게 먹히우지 않는 원칙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 두 개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방식으로 실현돼야 한다”라고 설명하였다.
남북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가 더욱 공고해져서 더는 체제통일을 지향하면서 “평화통일”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이 연방공화국을 완성된 통일국가의 형태로 제시한 중요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은 크게 연방형성의 원칙, 연방기구, 연방국가의 명칭과 성격, 10대 시정방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상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이란」, 연합뉴스, 2000.10.6. 참조)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김일성 주석은 민족대단결을 중시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자신이 직접 작성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힘 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어 모두 다 나라의 통일과 통일된 조국의 융성번영을 위하여 특색있는 기여를 함으로써 민족분열을 끝장내고 통일된 7천만 겨레의 존엄과 영예를 세계에 떨쳐야 한다.”
이상은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총론의 일부 내용인데, 통일에 동의하는 민족 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로 조국통일에 이바지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주석의 민족대단결 사상이 어떤 것인지 그 일단을 들여다볼 수 있는 듯하다.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은 1993년 4월 7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에서 당시 강성산 북한 총리의 의안 보고를 통해 발표되었는데, 10대 강령이 발표될 당시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과 비핵화공동선언 등으로 열린 대화 국면이 끝나고 정세가 다시 격화하는 상황이었다. 북미 관계가 전쟁으로 치닫는 와중에 김영삼 정부도 미국의 편에 섰으며, 이에 따라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은 물론 남북대화도 전면 중단되고 말았다.
김일성 주석은 이런 정세에 대응해,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전체 민족 구성원이 힘을 모아 위기를 타개하고 조국 통일로 나가자는 취지에서 10대 강령을 발표했다고 한다.
(이상 조정훈, 「“전민족이 힘합쳐 통일을 이루자”」, 통일뉴스, 2018.4.6. 참조)
김일성 주석은 항일 운동 시기부터 민족대단결을 강조했다고 한다.
매일경제는 「北매체, 김일성과 천도교 간부 인연 소개」라는 제목의 2005년 기사에 “조국광복회는 김 주석이 1936년 5월 5일 중국 동강에서 국내외의 반일 인사들을 망라해 결성했다는 첫 반일 민족통일전선 조직이며, 민족대단결 노선은 ‘조국광복회 10대강령’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라고 썼다. 또 김일성 주석이 항일 운동 시기 박인진 천도교 도정과 인연을 맺었던 사실을 함께 소개했다.
이를 통해 김일성 주석이 항일 운동 시절부터 민족대단결을 강조하였고, 그 실현을 위해 천도교와 같은 종교인들까지 만나 항일 운동에 끌어당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2년 중앙일보 기사에는 김일성 주석이 일본 아사히 신문과 진행한 다음과 같은 인터뷰 내용이 소개돼 있다.
“얼마 전 독일의 작가 루이제 린저 여사로부터 문선명 통일교교주와 만나지 말라는 편지가 왔다. 그러나 민족대단결을 모토로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와도 만날 생각이다.”
여기에서도 김일성 주석이 민족대단결을 중요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 북한주석 일 아사히 신문과 일문일답」, 중앙일보, 1992.4.2.)
남북기본합의서
김일성 주석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내오는 데 합의한 고위급회담 대표단을 편하고 빠르게 평양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개성으로 헬기를 띄웠다고 한다.
1991년 12월 13일 오전 9시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서명식을 하고 오후 4시 40분 판문점을 통과한 고위급회담 대표단은 개성에서 헬기로 갈아타고 평양으로 직행했다.
김일성 주석은 이들을 금수산의사당(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불러 만찬을 함께 했다. 김일성 주석이 연형묵 정무원 총리 등 고위급회담 대표단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은 다음날 노동신문 1면 머리로, 그 밑엔 남북기본합의서 전문이 크게 실렸다.
2022년 1월 3일자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당시 노동신문은 김일성 주석이 “대표단 성원들이 조국통일의 밝은 전망을 열어놓은 데 큰 기여를 하고 돌아온 데 대하여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셨으며 그들의 성과를 축하하셨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1991년 12월 15일 노동신문은 기본합의서를 “나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일일천추로 갈망해오던 해내외의 우리 민족 모두를 커다란 환희의 결정에 휩싸이게 한 획기적인 합의문건”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김갑식,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북한의 입장」, 『통일정책연구』 제20권 1호, 2011.)
김일성 주석이 고위급회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남북기본합의서를 내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일성 주석은 1992년 2월 6차 남북 고위급회담을 위해 북한을 방문한 정원식 수석대표(당시 국무총리) 등 남쪽 대표단을 만나기도 하였다. 남북기본합의서를 내온 성과를 이어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포 만남
김일성 주석은 방북한 동포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1989년 3월 26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청으로 방북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 문익환 목사를 만났다.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에 대해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과 만나 서로 흉금을 열어놓고 민족의 미래에 관하여 진정으로 대화를 교환”했다고 말한 바 있다. (「[오늘 다시보기] 문익환 목사 방북(1989)」, MBC, 2019.3.25.)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4월 1일 문익환 목사의 숙소를 찾은 김일성 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신년사에서 언급한 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김수환·문익환·백기완에 대한 평양 초청은 아직 유효하며 모든 집단적·개별적 방문을 환영한다. 1민족 1국가 2자치정부 형식의 점진적 통일을 위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야 한다. 불가침 선언을 채택한 뒤 쌍방간 군비축소를 단행하고 동시에 이산가족 내왕, 철도 연결, 금강산 공동개발을 비롯한 경제·문화·인도적 문제를 해결하자.”
같은 보도에 따르면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 주석이 고령임에도 무척 건강하며 정확한 기억력과 국민에 대한 강고한 장악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말했다. (「문익환 목사 북한 방문」, 경향신문, 2005.2.23.)
재미동포 기자 문명자 씨도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명자 기자는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 방북 취재를 시작해 1992년,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해 세계적 관심을 받았다. 문명자 기자는 1994년 김일성 주석 서거 직후 평양을 방문, 조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유일한 외부 언론 인사로도 알려져 있다.
김일성 주석과의 이런 인연 때문인지 2014년 6월 출판된 책 『통일의 길에 이름을 남긴 애국인사들 1』(평양출판사)에는 문익환 목사, 문명자 기자 두 인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
문익환 목사에 대해서는 “늦봄은 어찌보면 무르녹은 봄이고 어찌보면 늦어버린 봄, 한마디로 뒤늦은 봄”이라며 “그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지만 그는 오늘도 뛰는 가슴으로 사람들에게 통일의 활력을 부어주며 통일운동의 시계를 멈추지 않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문명자 기자에 대해서는 “정의의 필봉을 추켜들고 조국통일운동과 반독재민주화투쟁에 삶의 자욱을 뚜렷이 새긴 여류기자”라며 “그의 필봉은 반통일세력을 사정없이 휘갈겨친 무서운 글폭탄”이라고 평가했다.
책은 “통일에 뜻을 심고 통일에 심신을 깡그리 바치는 그러한 삶이 조국이 알고 민족이 기억하는 참다운 삶, 애국의 삶”이라며 “통일애국의 역사는 부정될 수도 지워버릴 수도 없다”라고 출판 이유를 들었다. (조정훈 「北 신간 『통일의 길에 이름을 남긴 애국인사들 1』 공개」, 통일뉴스, 2014.12.8.)
김일성 주석은 이외에도 1989년 1월 방북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같은 해 6월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방북한 임수경 씨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사업
3대 헌장 정립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이 내온 조국통일 3대 원칙(7.4 남북공동성명에서 밝힌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등 세 가지를 묶어 조국통일 3대 헌장이라 칭하고 이를 계승하였다. 이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통일사업 성과를 이어가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6년 11월 24일 판문점을 방문했을 당시 ‘3대 헌장’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으며, 이듬해인 1997년 8월 4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조국통일 3대 헌장’이 정식화되었다.
2017년 8월 3일 위 논문 발표 20돌을 기념한 평양시 보고회에서 리선권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은 이 논문을 가리켜 “위대한 수령님의 자주통일사상과 노선, 고귀한 업적을 전면적으로 집대성하고 민족의 최대 숙원인 조국통일위업 실현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에 과학적인 해답을 준 불멸의 총서”라고 설명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국통일 3대 헌장’의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2001년 8월 14일 평양 통일거리 남쪽 입구에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을 세웠다. 10만여 m²의 부지에 아치문 모양으로 세워진 탑은 화강석으로 부조된 여성 2명이 ‘3대 헌장’ 마크를 들고 있는 모양이다.
북한은 이 기념탑을 두고, “조국통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한시도 미룰 수 없는 지상의 과업이며 민족 최대의 염원이라는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통일사업 성과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에 기초해 조국통일 의지를 가다듬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 조정훈, 「북 통일정책의 집대성 ‘조국통일 3대헌장’」, 통일뉴스, 2017.8.4. 참조)
민족대단결 5대 방침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8년 4월 18일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 50주년 기념 중앙연구토론회에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기자」라는 제하의 서한을 보냈으며, 여기에서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이하 5대 방침)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족의 대단결은 철저히 민족자주의 원칙에 기초하여야 한다’, ‘애국애족의 기치, 조국통일의 기치 밑에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면 북과 남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위해서는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반대하고 외세와 결탁한 민족반역자들, 반통일세력을 반대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북과 남, 해외의 온 민족이 서로 내왕하고 접촉하며 대화를 발전시키고 연대 연합을 강화하여야 한다’ 등이다.
이 5대 방침은 김일성 주석이 1993년 4월 6일 제시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의 내용을 기초로 당시 시대 상황에 맞게 이를 압축적으로 재정리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족대단결오대방침’ 항목)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국통일을 바라는 전체 민족 구성원이 단결하여 난국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가자는 취지에서 5대 방침을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5대 방침이 발표된 1998년은 1990년대 소위 ‘고난의 행군’의 여파가 지속할 때였고, 미국의 대북 압박 공세가 여전히 거센 가운데 한국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1993년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이 발표될 당시와 비슷한 정세국면이었다.
이로부터 약 2년 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6.15공동선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분단 역사상 최초로 남측의 대통령과 만나 회담을 가졌다. 6.15공동선언 서문은 그 역사적인 장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15공동선언과 관련해 “선군정치에 기초한 우리의 주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역사적인 평양 상봉이 이루어졌다”라고 밝혔다. 이는 북한이 북미 핵대결이 펼쳐지는 와중에 ‘고난의 행군’까지 겪어야 했는데, 선군정치를 통해 북미 대결을 일시적으로 완화하였고 그 기회에 남북정상회담을 열 수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상회담 기간 동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공항에 직접 나가 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예정에 없던 차량 동승으로 두 정상만의 비밀 회담을 가졌다. 60만 평양시민이 연도에 나와 환영 인사를 했다. 이런 파격적인 행보는 세계 외교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전격적인 조치였다.
6월 14일 공식적인 첫 단독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분단 55년만에) 우리가 처음 상봉하는 것만큼 7천만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낙관을 주는 선언적인 문건을 하나 내놓는 것이 좋겠다”라며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대화를 이어갔고, 4시간 동안의 회담 끝에 공동선언을 내놓게 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에 부시 정권이 들어서고 남북 관계 개선을 방해하지만 “우리는 조국통일을 위해 나서는 사람들은 다 포섭하여 민족적 단합을 이룩해야 한다”라며 6.15공동선언을 계속 이행해 나갔다.
2007년 6월까지 고위급회담만 20차례, 이산가족상봉도 15차례 진행했으며, 평양방문객은 4만 명, 금강산 관광은 200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휴전선 일대 개성에 주둔한 군대를 뒤로 물려 개성공단을 개발했으며, 경의선과 동해선을 연결하고 바닷길 하늘길도 모두 이어놓았다.
6.15공동선언 채택 당시 자리에 함께한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격식을 따지지 않는 합리적이고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일단 결정을 내리면 정말 화끈하게 일을 처리하는 형의 지도자”라고 격찬했다.
당시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방북한 김민하 전 중앙대 총장은 “김정일 위원장은 판단력이 빠르고 유머 감각과 회의장을 주도해나가는 능력이 탁월했다”라고 방문 소감을 밝혔다.
(이상 강호석, 「김정일 열풍과 잠깐 맛 본 통일6.15」, 현장언론 민플러스, 2022.2.22. 참조)
10.4선언
노무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장관급회담으로 남북관계 발전을 이끌어 가기가 어려워지면서 더 높은 급에서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서게 되었고 이에 따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을 결단한 듯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 10월 2일 7년 전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 전 대통령을 맞이했듯 4·25 문화회관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일부터 4일 사이 노무현 대통령을 모두 4차례 만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을 ‘극진히’ 영접하였고 역사적인 상봉과 회담들을 진행한 끝에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을 채택하였다. (이광길, 「‘2007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대선’」, 통일뉴스, 2007.12.29.)
3일 오전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첫 정상회담에 앞서 환담하던 중 노 대통령이 직접 영접해 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자 “대통령께서 오셨는데 내가 뭐 환자도 아닌데, 집에서 뻗치고 있을 필요가 없지요”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박병수, 「노 대통령-김 위원장 정상회담 ‘대화록’」, 한겨레, 2007.10.3.)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합의한 10.4 선언이 잘 이행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2007년 11월 16일 청와대를 방문한 김영일 당시 북한 내각총리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10.4 선언’이 빈 종잇장이 돼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다. (김홍국, 「김정일, 盧에 “10.4선언 빈 종잇장 돼선 안돼”」, 뷰스앤뉴스, 2007.11.16.)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또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남측을 방문(11월 29일~12월 1일)하도록 했는데, 그 목적은 공식발표에 따르면 “역사적인 2007 남북정상선언과 그 이행을 위한 중간 평가와 향후 추진방향을 함께 협의하고 남북협력사업 분야의 현장 시찰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광길, 앞의 글)
동포 만남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8년 10월에는 백화원초대소에서, 1999년 10월에는 함남 흥남초대소, 2000년 6월에는 원산에서 모두 세 차례 정주영 전 회장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고령인 정 전 회장을 만날 때마다 건강상태를 묻고 음식을 직접 챙겨주는 깍듯함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1998년 10월 30일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후 10시 25분쯤 정 회장이 묵고 있는 평양의 백화원초대소를 찾았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이라면서, “명예회장 선생께서 연로하시고 거동이 불편하셔서 직접 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45분간 면담을 진행하며 금강산관광, 북한 연안에 대한 남북 공동석유시추작업 등 경협사업 등을 논의하였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주영소떼방북사건’ 항목)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1년 정 회장이 사망하자 분단 사상 처음으로 조문 사절단을 보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11년 3월에도 정 회장의 10주기를 추모하는 구두 친서를 보냈다. 이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2011년 3월 18일 금강산에서 현대아산 관계자를 만나 “정 회장이 민족 화해와 협력의 길을 개척하는 등 큰일을 했다. 그의 명복을 기원하고 아울러 현대 일가의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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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사업은 2018년 판문점과 평양에서 이어진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의전 및 합의문, 그 후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계속된 민족대단결 원칙에 부합하는 언급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현재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이 대북 적대 정책을 유지하면서 남북 관계 발전을 가로막는 속에 반북 대결론자인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된 상황이라, 향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어떤 식으로 통일 사업을 펼쳐 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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