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된 진실 일본군은 이미 한반도에 들어왔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7-13 18:57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1950년 7월, 일본이 또다시 한반도에 들어왔다
일제 패망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은 일본 경제가 한국전쟁에 따른 이른바 ‘전쟁특수’로 살아났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병참기지·후방기지였던 일본에서 대량 생산된 일본산 전차, 탄약, 통조림, 트럭, 항공기, 선박이 무더기로 한반도에 들어왔다.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전범국 일본은 우리 민족이 참혹하게 흘린 피를 밟고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그런데 후방지원을 넘어 일본이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했다면 사안은 훨씬 심각하다. 한반도를 식민침탈한 전범국이자 평화헌법 도입으로 군사력 동원 자체가 막혀있던 일본이 전쟁을 벌인 것이기 때문이다.
군인 출신으로 한국미래문제연구원 연구기획실장을 지낸 이종판 박사는 GHQ(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 총사령부)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의 참전을 뒷받침했다고 밝혔다. 이종판 박사는 “1950년 7월 8일, 맥아더의 명령으로 창설된 경찰예비대는 주일미군의 한국전쟁 투입에 따른 일본의 치안공백을 대신하면서 유엔군의 출동을 지원했고, 해상보안청을 증원하여 소해활동까지 투입되었다”라고 지적한다.
이후 1950년 10월 맥아더는 원산 상륙작전을 앞두고 일본 해상보안청 장관 오쿠보 다케오에게 일본 소해부대 출동을 요구했고, 총리인 요시다가 이를 즉각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종판, 「한국전쟁 당시 일본의 역할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7.2.)
소해활동은 바다에 부설한 기뢰 등 위험물을 처리하는 활동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인 상당수는 미군을 대신해 각 부대에 소속돼 기뢰를 제거하는 작전을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01년 6월 22일 MBC에서 방송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35회 「6.25 일본 참전의 비밀」 편에는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이 나온다.
“미군의 명으로 갑자기 조선으로 가게 됐습니다. 어떤 일이 있을지 몰라 의복을 보냅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35회 「6.25 일본 참전의 비밀」 방송에서 공개된 ‘한국전쟁 참전 일본인’ 나카타니 사카타로가 가족에게 남긴 편지 내용 일부
미군의 명령에 따라 한국전쟁에 소해부대 대원으로 참전한 나카타니는 1950년 10월 17일 한반도 원산 영흥만에서 죽었다. 집으로 직접 찾아와 나카타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린 미군과 일본 해상보안청 관계자는 ‘외부에 얘기하지 말라’며 나카타니의 가족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고 한다.
1987년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일본 참의원에서 제기된 일본인의 한국전쟁 참전 관련 물음에 “정확하게는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이 곤란하다. 또한 소해부대 파견은 미국 극동해군사령관의 지령에 따라 행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확인하기 어렵다”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일본으로서도 참전이 떳떳하지 못한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인이 어느 정도 규모로 참전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반도 주변 해상에 설치된 기뢰를 제거하는 역할을 맡았던 일본인 소해부대로만 보면 1950년 10월 10일부터 12월 4일까지 원산, 군산, 인천, 해주, 진남포 등에서 연인원 1,450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더구나 한반도에 들어온 일본인이 소해활동만 한 것도 아니다. 8,000명이 넘는 일본인이 소해활동뿐만 아니라 해상운송 관련 노동 등을 명목으로 동원됐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인들의 수는 1950년 7월 기준 2만 5,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일본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소속되는 방식으로 간호사, 노동자 등 인력을 한반도로 보냈다. 이를 볼 때 전범국 일본이 미국의 편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해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쉿 전투는 비밀’‥미군이 일본의 살상을 허가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으로 건너와 지리가 밝았던 옛 일본군 출신 장교들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앞잡이였다. 일제 패망 이후 초대 주일대사 로버트 머피가 ‘지리에 밝은 일본 기술자의 지원이 없었으면 미국은 한국에 남아있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전범국 일본의 참전을 대놓고 공개한다는 건 미국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현재까지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일본의 참전을 모르는 척 쉬쉬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정부가 남긴 공식자료에서는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의 참전을 모른 척 잡아뗀다고 해서 진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1년에 펴낸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1권」을 살펴보면 일본의 참전에 관한 미국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내용이 나온다. 아래에 정리해 소개한다.
1950년 7월 10일 공화당 상원의원 호머 케이프하트는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유엔군에 편입되는 형태로 일본인을 자원병으로 투입하자고 했다. 이후 민주당 상원의원 워렌 매그너슨은 일본인을 개인 자격으로 미 육군, 해군, 공군에 들이자는 법안을 내기도 했다. 일본인이 개인 자격으로 참전하면 평화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허점을 악용하려 한 것이다. 매그너슨은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미국 군인보다 동양의 평화를 더욱 열망하고 있는 경험이 풍부한 일본인 전투원들”이라며 일본의 한반도 재상륙을 적극 추진했다.
한국전쟁 발발로 유엔군의 총사령관이 된 맥아더는 ‘일본의 참전을 검토해달라’는 미 상원의 질의에 일본인의 한국전쟁 참전이 법적으로 불가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상 거절일 뿐 뒤에서는 일본의 참전을 터주려는 온갖 편법이 남발했다. 예를 들면 미국 측에서 일본인들에게 참전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경고한 뒤 전쟁터에 데려간 기록을 남기지 않는 식이었다. 앞서 미군 관계자가 나카타니의 가족들에게 함구령을 내린 사례를 소개했는데 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2018년 8월 11일 마이니치신문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된 미군의 극비 문서 ‘한국에서 일본인 무허가 수송과 사용’을 바탕으로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이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이 문서에는 일본인 60명이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27명이 총과 칼 등 무기를 지급받았다고 한다. 또 27명 가운데 18명은 실제로 무기를 사용했다고 기록돼 있다. ‘무기를 사용했다’라고 모호하게 나와 있지만 일본인의 전투를 가리키는 표현임이 분명하다.
극비 문서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대전 전투 때 미24사단 지휘관 윌리엄 딘의 지휘를 받은 우에노 다모쓰는 “몇 명의 북한 병사를 죽였는지 모른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오사카 출신 남성(당시 20살)은 “7개월간 전선에 있으면서 15~20명을 사살했다”, 도쿄 출신 남성(당시 12살)은 “북한군 4, 5명을 사살한 기억이 있다”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마이니치방송사 기자 출신 니시무라 히데키가 2019년에 펴낸 책 『‘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 –재일조선인과 스이타사건』에도 미국이 일본인을 전투에 동원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래에 관련 문장을 인용해 소개한다.
“20대부터 30대까지 (일본인) 사환과 취사병 일곱. 일행 일곱 명은 미군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대구 등 열 군데의 최전선에서 행동을 같이 했다.” -위의 책 189쪽
같은 책에서 미국 기병 1사단 소속 E8중대 대위 윌리엄 매클래인이 히라쓰카 시게하루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는 ‘히라쓰카가 8월 30일 전투에서 상당수의 적을 쓰러뜨린 후 전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마디로 일본인이 직접 전투에 나섰다는 얘기다. 이를 봐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인이 해상 기뢰 제거, 취사 같은 비전투적인 일을 넘어 전투에 깊숙이 가담한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일본에서는 요시다 총리 같은 우파 인사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성향이 짙은 진보 야권에서도 일본의 한국 참전을 무척 반겼다. 일본의 우파와 좌파가 진영을 뛰어넘어 한국전쟁 참전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계산에서만큼은 하나 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 일본인 학자의 연구, 일본 언론 보도는 ‘억지로 전쟁에 끌려가 희생된 일본인’, ‘평화헌법을 무시하고 자국민을 위험한 전쟁에 보낸 일본 당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조선을 식민침탈한 일본이 또다시 한반도를 군홧발로 밟았다는 사실에 관한 반성은 좀처럼 찾을 길이 없다.
현재진행형 : 미국과 일본의 한반도 침탈
“일본군은 원산항의 기뢰 제거, 인천상륙작전 준비, 간호병 파병 등 간접적인 지원뿐 아니라 731부대 요원에 의한 세균전 지원과 원폭투하 계획에까지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일본의 극우세력이 한국전쟁 참전의 대가로 한반도의 재식민지화를 미국에게 요구했다는 점이다. 이 계획은 불발로 끝났지만, 일본은 경제 부흥과 자위대 창설의 기회를 얻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전범국가에서 어엿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35회 「6.25 일본 참전의 비밀」을 제작한 박건수 PD가 일본 취재를 다녀와 쓴 글 중에서
미국은 일본에 참전의 대가를 톡톡히 줬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경찰예비대는 사실상 군사조직인 자위대로 탈바꿈했다. 특히 미군을 대신해 해상 기뢰 제거를 맡은 소해부대 출신 장교들은 해상자위대의 중핵이 됐다. 모두 미국이 허가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의 결정이 일본의 재무장, 군사대국화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하지만 양심 있는 한 일본인 학자의 연구를 통해 한국전쟁을 악용한 미국과 일본의 민낯이 폭로됐다. 한국전쟁을 연구해온 일본인 요네즈 도쿠야 씨가 쓴 박사학위 논문 「조선전쟁 보도와 심리전 ‘일본 미디어의 역할을 중심으로’」의 내용 일부를 번역해 아래에 소개한다.
위 논문에서 요네즈 씨는 “3년에 미치는 한국전쟁 기간은 딱 대일강화조약 발효에 따라 미군의 일본 점령이 끝나고 일본이 독립한 미묘한 시기에 해당한다”라며 “더욱이 일본인 참전 사실이 망각된 원인은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미군의 심리전과 정보통제, 그리고 그 (미군의) 무기가 된 (일본) 대중매체에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미국과 일본의 책임을 동시에 언급했다.
그러면서 요네즈 씨는 “한국전쟁기에 형성된 악마화된 ‘북조선(한)’상과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지금도 일한의 사이에서 계속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 분명해졌다”라고 지적했다.
과거 “한국전쟁은 축복”(한국전쟁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 미8군 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을 지낸 밴 플리트가 한 말)이라며 하나 같이 입을 모았던 미국과 일본이 또다시 한반도에서 손을 맞잡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특히 최근 들어 평화헌법 개정과 자위대의 정규군화를 밀어붙이는 일본과 이를 묵인하는 미국의 행태가 무척이나 위험하다.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든 말든, 평화가 어떻게 되든 제 잇속 차리기에 충실한 외세일 뿐이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경제대국, 재무장이라는 막대한 이득을 본 일본으로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에 참전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을 것이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한국전쟁 당시 일본의 참전은 미국의 허가에 따라 가능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지난 7월 4~8일 사이 자위대가 한·미·일 3국 초급장교 심포지엄을 구실로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자위대 장교들은 미8군의 초청으로 미군기지가 있는 평택 험프리스를 비롯해 국내 여기저기를 오갔다고 한다.
윤 대통령의 동의가 없었다면 자위대는 감히 한국 땅에 발을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자위대가 미국이 주도하는 합동훈련에 껴서 국내에 은근슬쩍 들어온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해당 자위대 인사는 결국 정부의 항의를 받고 한국을 떠났다고 한다.
일본의 관점에서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강조하며 알아서 일본 재무장화·군사대국화의 길을 닦아주는 윤 대통령의 행보가 꽤 반가울 듯하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사대매국 정권을 지지하고 신뢰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 점을 미국과 일본의 바짓가랑이나 부여잡으려는 윤석열 정권은 똑똑히 명심해야 한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