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진석 국힘당 비대위원장의 발언으로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정진석은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라며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유를 우리 민족의 탓으로 돌렸다. 명백히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이다.
정진석의 논리는 100여 년 전의 친일매국노 이완용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시간은 흐르고 역사는 진보해왔지만 외세에 빌붙어 오로지 자기 살길만 도모하는 매국노의 천박한 인식은 변하지 않았음이다.
그러나 조선 민중은 한순간도 이 땅에 외세를 허락한 적이 없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 권력이나 외세에 빌붙어 일신의 영달을 꾀하던 족속이 어떻든 조선 민중은 한결같았다. 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강화도조약, 분노한 민중
일제가 침략의 총칼을 휘두르며 조선을 집어삼키고자 시도했던 그 순간부터 조선 민중의 저항은 시작되었다. 강화도조약의 내용과 개항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에는 분노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조선 민중은 조약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적 침략에 맞서 싸웠던 것처럼 조약이라는 탈을 쓴 일제의 약탈에 맞서 싸우는 저항이 이어졌다.
특히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 이외의 추가 개항장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자 조선 민중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에 항의했다. 개항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 공사가 한양을 찾았을 때이다. 분노한 민중들은 연회장 대문 앞에 시원하게 오줌 세례를 퍼부었다. 연회를 마치고 문을 열고 나온 일본 공사는 흥건한 오줌 웅덩이를 마주해야만 했다.
이후에 일본 공사가 다시 한양을 방문하자, 조선 민중은 돌 팔매질로 화답했다. 일본 공사를 향한 분노의 돌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혼비백산한 일본 공사는 무례한 짓을 그냥 둘 수 없다며 다음날까지도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일본 공사와 관련한 일화에서 당시 조선 민중의 반일 감정과 분노의 수위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군이 연안을 비롯해 조선 땅을 측량한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조선 민중은 그 현장에 찾아가 적극적으로 항의했다. 나라의 주권을 짓밟는 해안측량을 허용해준 조선 정부와의 모습과는 대조되는 장면이다.
위정척사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대표적으로 최익현은 도끼를 메고 대궐 앞에 나타났다. 그는 다섯 가지의 이유를 들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반대했다. 일본의 강요로 인해 맺은 조약이 조선을 망하게 할 것이라며 눈물로 호소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최익현의 뒤를 이어 전국의 유생들이 일본과의 조약의 체결과 개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수탈이 시작되다
조선 민중과 유생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군사력을 앞세워 조약의 체결과 개항까지 이뤄낸 일본은 조선의 경제를 노골적으로 약탈했다.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조선의 대외 무역은 일본이 독점한 상태로 그 규모가 빠르게 확장되었다. 일본과의 무역은 1876년~77년 20만 원 대에서 1879년에는 100만 원 선을 돌파하고 1880년 즈음에는 300~400만 원으로 확대되었다. 5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일본과의 무역 규모가 15배 가까이에 증가한 것이다.
강화도조약에 따른 부산 개항을 시작으로 1880년에는 원산이, 1883년에는 인천이 잇따라 개항했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조선 땅에 진출한 일본 상인의 만행은 상상을 초월했다. 교역 초반에 조선과 일본 사이의 표준 물가가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일본 상인은 그것을 십분 활용했다. 이를테면 100엔짜리 물건을 1,000엔에 파는 식이었다. 상인이 아닌 날강도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일본의 약탈적 본색이 강하게 드러난 것은 쌀이었다. 일본은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선의 쌀과 콩 등 곡물을 약탈적으로 사들였다. 원래 1882년 조일수호조규속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일본 상인의 활동 무대는 개항장으로만 제한되었다. 그러나 일본 상인들은 내륙 지방에 몰래 들어가 곡물을 빼돌리는가 하면 조선 사람에 돈을 빌려준 후 그것을 곡물로 갚게 하는 등 갖은 수를 다 썼다. 1879년 일본 상인들이 동래 인근의 내륙 지방에 침투해 쌀 수백 석을 사들이다 발각되는 일도 있었다. 명백한 불법행위였으나 관련한 조선인만 처벌받았을 뿐, 일본 상인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곡물 수출은 빠르게 증가해 전체 수출의 50~60%에 육박하게 된다. 조선의 수출 품목이 곡물에만 집중된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이는 조선이 일본의 식량 창고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일본은 자국보다 저렴한 조선의 쌀을 헐값에 사들여 일본의 공업지대에 집중적으로 공급했다. 조선을 약탈해 자기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삼은 것이다.
문제는 쌀이 우리의 주식이라는 것이다. 쌀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데 일본이 조선의 쌀을 모조리 쓸어 가버리니 정작 조선에서 쌀이 희귀해지기 시작했다. 쌀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때를 노려 쌀을 비싼 값에 되팔아 이득을 챙겼다.
일본이 조선의 쌀로 자기 배와 주머니를 불릴 때, 조선의 농민들은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농사짓는 족족 일본으로 쌀이 유출되니 민중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농민들은 자신이 농사지은 쌀을 구경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일본에 내줘야 했다. 거기에 극심한 자연재해에 흉작까지 겹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전국 곳곳에서 지방관의 지시로 쌀의 유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기점으로 1904년까지 100여 건에 달하는 방곡령이 있었다고 하니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방곡령은 일본의 약탈을 막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쌀은 주권’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이 수탈한 것은 다름 아닌 주권이다. 그러니 수탈당한 나라의 주권을 방곡령으로 되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쌀만이 아니다. 일본은 조선의 금도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1877년 이후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금 수출량이 급증했다. 일본은 왜 금에 눈을 돌렸을까? 당시 국제 통화 체제는 금본위제였으나, 일본은 금본위제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 보유량을 늘리는 것은 금본위제 시행의 밑거름이자 일본의 화폐가치를 높이고 나아가서는 경제를 안정화하는 밑거름이었다.
1878년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금의 양을 보면, 전체 수출액의 25%에 이른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런데 금의 경우, 상대적으로 휴대와 운반이 쉬워 신고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빼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고려했을 때, 실제 빠져나간 금의 양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쌀에 이어 금까지. 조선의 부가 일본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유출됐다.
게다가 일본이 금본위제를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화폐는 일본이 아닌 타국에서는 일본 정부의 보장을 받을 수 없는 종잇장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은 종이와 조선의 금을 맞바꾼 셈이다. 파렴치한 사기꾼들이다.
그런데 조선은 이런 일본과의 거래로 인해 경제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일본 화폐의 무분별한 침투로 조선의 화폐제도는 이원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화폐가치가 땅에 떨어졌다. 불안정한 일본 돈이 조선 돈을 잡아먹은 꼴이었다.
자국의 화폐가치가 급락하니 경제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돈을 들고 있던 대다수 조선인의 삶도 같이 급락하게 된 것이다. 이 혼란의 부담은 고스란히 조선 민중의 몫이 되었다.
일본이 판 것은
그렇다면 일본이 조선에 판 것,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사들인 것은 무엇일까? 바로 면제품이다. 면제품은 당시 일본으로부터 조선이 수입해오는 품목에서 매해 50% 이상, 많게는 80%에 이르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일본은 영국에서 값싸게 사들인 면제품을 조선에 파는 식의 중계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오는 면제품이 기본적인 관세마저 없이 밀려 들어오니 조선의 면 생산 농민들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조선의 면 생산 농민과 면제품 생산업은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오로지 일제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경제 구조가 허물어진 것이다.
일본과 조선의 무역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시장 개척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원료를 약탈할 수 있는 공급지이자 자기가 만든 상품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한번 시작한 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은 날이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약해지진 않는 법이다. 조선 민중의 고혈을 짜는 일본과 썩을 대로 썩어버린 봉건 정치 세력에 민심이 폭발하게 되니 바로 임오군란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