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4. 북한 경제 성장이 미칠 파장
1) 남북 경제력의 역전
연구자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80년대를 거치며 남북의 경제력이 역전되었다고 본다. 그전에는 북한 경제가 한국을 앞서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 대표적 사례를 꼽아보자.
북한은 1968년 평양 지하철을 착공해 1973년 9월 개통했다. 1975년에는 1호선 격인 천리마선에 이어 2호선 격인 혁신선도 개통하였다. 전동차량도 직접 개발하였으며 이름은 ‘자주호’였다. 한국의 경우 지하철 1호선을 1970년에 착공해 1974년 8월 개통하였으며 2호선은 1980년에 개통했다.
▲자주호 기념우표. [사진 출처: CollezioniVarie.sigratis.it] |
컬러텔레비전 방송도 북한이 빨랐다. 북한은 1953년 방송 기반 시설 설치를 거쳐 1961년 시험 방송을 시작, 1963년부터 흑백 방송을 송출하였고 1974년 컬러 방송을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 1961년 12월 31일 흑백 방송을 시작해 북한보다 빨랐지만 이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지시로 무리하게 시작한 것이었고, 컬러 방송의 경우 1975년 시험 방송을 시작하고 1980년에야 본방송을 송출하기 시작했으니 상당히 뒤처졌던 셈이다.
▲ 1972년 자동화 공정을 갖춘 평양의 한 신발공장.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생산된 신발이 지나가면 직원이 품질검사를 한다. |
▲ 1972년 포장지 인쇄공장. 포장지를 인쇄하면서 동시에 상품을 자동으로 포장하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첨단 기계를 갖추고 있다. |
▲ 1972년 평양의 한 상점. 각종 상품이 즐비하다. |
당시 한국에는 북한에 지하철이 있거나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철저히 정보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통해 “‘평양에 지하철이 있다, 컬러텔레비전이 있다’는 등의 발언만으로도 징역형”에 처하도록 했다. (「진실위 “유신시절 긴급조치 인권침해 심각”」, 파이낸셜뉴스, 2009.9.1.) 그만큼 북한과의 경쟁에서 뒤처진 것에 대해 초조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국으로 유입되는 정보는 어떻게 차단한다고 해도 해외에 퍼진 북한 소식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해외 언론은 빠르게 발전하는 북한 경제 소식을 자유롭게 다뤘다. 당시에는 국제 사회에서 한국보다 북한이 인지도가 높고 영향력도 클 때였다. 만약 한국인이 해외에 나간다면 신문, 방송을 통해 북한 소식을 알게 되며 이게 국내에 퍼지면 여론이 동요할 수 있었다. 실제로 업무상 해외에 나간 사람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북한 소식이 퍼졌다. 이걸 막기 위해 정부가 선택한 방법은 아예 해외에 나가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정부는 국민에게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허용하지 않았다. 공무원 출장이나 기업 출장, 유학, 해외 취업 등 특별한 목적이 있어야만 가능했고 여행을 위한 여권은 아예 발급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유치로 인해 더 이상 해외여행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3년 50세 이상 국민을 대상으로 200만 원을 예치하면 연 1회 해외여행을 허용해주기 시작해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를 실시했다. 대신 철저한 신원조사를 하였으며 한국관광공사 산하 관광교육원, 자유총연맹, 예지원 등에서 수강료 3천 원을 내고 반공교육을 받고 교육 필증을 제출해야 여권을 발급해주었다. 그러다 1992년에야 반공교육을 폐지하였다.
그랬던 남북의 경제력 차이는 80년대에 뒤바뀌더니 90년대 들어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는 동안 한국은 엄청난 양적 팽창을 하였다. 자료를 보면 198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의 경제성장이 가파르게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새롭게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동구권 시장에 진출한 게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은 남북 경제력 차이를 선전하기 위해 밤에 북한 지역만 불이 꺼진 인공위성 사진을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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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배경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20년 6월 25일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 “남북 간 체제 경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북한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 남북 경제력이 다시 역전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북한 경제가 고속 성장한다고 해도 현재 남북 경제력 차이가 매우 큰데(문 전 대통령은 국내총생산, 즉 GDP가 40배 차이라고 했다) 설마 역전까지 되겠나 싶을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경제 현황과 미래를 살펴보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듯하다.
위의 한국 1인당 국내총생산 그래프를 보면 세 차례 떨어지는 부분이 보인다. 바로 1997년 IMF 사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사태, 최근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발생한 마이너스 성장이다. IMF 사태 때도, 세계 금융위기 사태 때로 한국 경제는 힘들었지만 1, 2년 정도 지나서 다시 회복하였다.
하지만 이번의 경제 위기는 회복될 가망이 없다. 한국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권 전반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다.
2) 출로가 없는 경제 위기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세계 경제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런데 지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권 전반이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전국 대학 경제·경영학과 교수 20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현재 한국의 경제 상황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사태 때와 비슷하다는 답이 27.1%, 그보다 더 어렵지만 IMF 사태 때보다는 덜하다는 답이 18.7%, IMF 사태 때와 비슷하거나 더 어렵다는 답이 6.9% 나왔다. 즉, 지금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사태와 비슷하거나 더 심각하다는 답이 52.7%로 과반을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패권 다툼 등 대외 여건 악화가 57.4%, 대외 의존적인 우리 경제·산업 구조가 24.0%를 차지했다. 다시 말해 세계 경제 위기로 인해 한국 경제도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는 말이다.
문제는 세계 경제 위기가 일시적이며 1, 2년 정도 지나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그런 위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현 세계 경제 위기는 출로가 없다.
11월 13일(현지 시각)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15일 열리는 G20 정상회담에서 세계 경제 위기 해결을 위한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영(0)’에 가깝다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으로 G20 국가들의 불화를 지적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사태 때 G20 국가들이 협력해서 위기를 극복한 것과 지금 상황은 정 반대라고 평가했다. 스리 믈랴니 인드라와티 인도네시아 재무장관도 “2008년에는 모두가 같은 적에 대응해 같은 배를 탔지만, 지금은 모두가 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G20 국가 간 불화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은 오랜만에 미국과 대면 정상회담까지 했지만 여러 쟁점에서 대립하며 별다른 합의를 내지 못했고, 미국과 갈등을 빚은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감산 결정으로 유가 상승에 동참해 유럽의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를 무력화했다.
미국이 불화의 중심에 서는 이유는 자명하다. 애초에 세계 경제 위기를 불러온 것도 미국이 공존, 공리, 공영을 거부하고 이익을 독점하려 했기 때문이며, 지금도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다른 나라의 희생을 강요하며 자국만 살아남으려 하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 경제 위기의 원인으로 꼽히는 미중 경제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모두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세계 경제 2위 국가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중 경제 전쟁을 일으켰으며, 러시아를 포위·압박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추진해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
지금도 미국은 자국 경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대만을 부추겨 중국을 전쟁으로 유도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무기를 공급하며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러시아가 미국이 바라는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보니 중러를 집어삼켜 경제를 살리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3) 강달러 정책
미국이 강달러 정책을 쓰는 것도 결국은 다른 나라를 희생시켜 자국 경제를 살리려는 수작이다.
지금 미국 경제 상황은 1980년대와 비슷하다. 당시에도 미국은 높은 물가상승을 막기 위해 금리를 20%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전 세계 달러가 미국으로 들어가 달러 가치가 약 50%까지 치솟았다. 쉽게 말해 전에는 2천 달러로 일본 차 2대를 구입했다면 이제는 같은 돈으로 3대를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인들은 미국산 제품보다 값싼 수입 제품을 사기 시작했고 이는 심각한 무역 적자와 함께 미국 제조업의 파산을 불렀다. 특히 일본 자동차가 엄청나게 수입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미국 노동자들이 일본 차를 부수며 시위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금리를 다시 낮추면 물가상승이 재개될 수 있고, 금융자본도 달러가 빠져나가면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고금리를 계속 유지하면서도 달러 가치를 낮출 방안을 모색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1985년 플라자 합의다. 플라자 합의에 따라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를 강제로 높여 1년 후 달러 가치가 거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당시와 지금 미국의 처지가 바뀐 게 있다. 당시 미국은 제조업 규모가 아직 클 때라서 상품 수출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제조업이 거의 죽어서 수출보다는 수입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강달러를 통해 값싸게 수입할 수 있으니 물가상승을 막는 데도 유리하다. 즉, 지금 미국은 1980년대와 반대로 강달러가 더 유리하다. 그래서 강달러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반면 강달러는 다른 나라의 물가상승을 부르는 등 세계 경제에 여러 부작용을 낳고 있다. (「강달러가 걱정스러운 5가지 이유」, 연합뉴스, 2022.9.13.)
미국은 당분간 강달러 정책을 고수할 것이다. 지난 10월 11일 피에르-올리비에르 고린차스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경제 전망 수정보고서 발표 직후 기자 회견에서 달러 강세를 완화해야 하지 않느냐는 기자 질문에 “달러 강세는 각국 경제의 기초체력(펀더멘털)을 반영한 것으로, 달러 강세를 막으려 할 게 아니라 각 국가가 여기에 적응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금융 시장은 ‘긴축 발작’(테이퍼 텐트럼, 유동성 흡수에 의한 시장 충격) 수준의 변동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며 강달러로 인한 세계 경제 혼란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했다. IMF가 미국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고금리·킹달러 충격에도 ‘강 건너 불구경’ 하는 미국과 IMF」, 한겨레, 2022.10.19.)
물론 이런 강달러 정책은 일시적으로 물가를 잡을 수는 있어도 장기적인 경제 회복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나마 남은 미국의 제조업이 다 몰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은 제조업을 다시 살리겠다며 해외에 나간 공장을 다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 정책을 펴고,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기업을 압박해 미국 내에 공장을 짓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이런 정책과 강달러 정책은 맞지 않는다.
※ 강달러 정책에 관한 추가 내용은 「[아침햇살204] 미국 경제위기의 원인과 전망」 참조
4) ‘칩4 동맹’의 함정
미국의 경제 위기 탈출 전략 가운데는 반도체 독점으로 동맹국을 털어먹겠다는 이른바 ‘칩4 동맹’도 있다.
일단 ‘칩4 동맹’이란 표현은 한국만 쓰고 있으며 다른 나라는 그냥 ‘팹(Fab)4’ 혹은 ‘반도체 공급망 협력’ 정도로만 표현하고 있다. 애초 미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주요 반도체 관련국을 일방적으로 끌어들이는 구상에 한국만 ‘동맹’이라는 그럴듯한 단어를 붙인 것부터 의심스럽다. 한국은 삼성전자의 낸드플래시 40%, 하이닉스 디(D)램 50%를 중국에서 생산하며, 전체 반도체의 60%를 중국에 수출하는데 이를 포기하고 미국에 붙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 아닐까 싶다.
칩4와 유사한 일이 역시 1980년대에 있었다. 1970년대 중반 미국 기업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0%였다. 반면 일본 기업은 30% 미만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NEC, 히타치, 도시바 등이 급격히 치고 올라가면서 1985년 미일 양국이 45%로 동률이 되었다. 특히 디램 분야만 보면 1978년 미일의 점유율이 각각 70%, 30%였다가 1986년에는 20%, 75%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이게 가능했던 건 일본 정부가 직접 반도체 기업을 보호하고 특혜를 주었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을 달성하기 위해 경기장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 - 미일 반도체 분쟁과 전략적 무역 정책 논쟁」, https://joohyeon.com/278, 2019.1.13.)
그러자 1986년 미국은 각종 제재로 일본을 압박해 일본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내용의 미일 반도체 협정을 강제로 체결했다. 구체적으로 ▲내수시장의 최소 20%를 외국 기업에 내줄 것 ▲정부 보조금을 기반으로 한 저가 공세 금지 등의 내용을 협정에 담았다. 즉, 일본 정부가 반도체 기업을 더 이상 보호하고 특혜를 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몰락하였고 일본은 장비와 소재, 부품을 공급하는 나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이 빈자리를 타고 한국이 반도체 산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칩4 동맹이 뭔가요? 우리한테는 이득인가요?」, 바이라인네트워크, 2022.8.2.)
이처럼 미국은 자국 반도체 기업을 살리기 위해 동맹국의 경쟁 기업을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린다. 칩4도 마찬가지다. 표면상 목적은 중국 견제이지만 숨은 목적은 한국과 대만의 생산기술을 뺏어 5나노 이하의 최첨단 반도체산업을 장악하는 것이다. 미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미국 기업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1980년대 일본이 당한 일을 이제 한국과 대만이 당할 차례다. (「한국 반도체 산업 미국에 뺏기나」, 한국경제, 2022.8.1.)
이런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9월 미 상무부는 세계 반도체 기업을 상대로 공급망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자발적 제출’ 요청이지만 45일 내 제출하지 않으면 ‘별도의 조치’에 나설 것이라는 ‘협박’도 덧붙였다. 미국은 반도체 재고, 주문, 판매, 고객사 정보 등 26개 항목을 요구했는데 다시 말해 영업 비밀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기업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마감 시한까지 버티다 미국의 보복을 우려해 결국 정보를 넘겼다.
칩4가 가동되면 이런 일이 빈번히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넘어간 정보가 과연 인텔, 마이크론, 퀄컴 같은 미국 반도체 기업에 제공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미국이 동맹국의 반도체 기업을 어떻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다. 10월 9일 대만 언론들은 미국이 중국의 대만 공격에 대비해 진행한 매우 특이한 훈련을 보도했다. TSMC 반도체 기술 인력을 대만 밖으로 철수시키고 TSMC 기반 시설을 파괴하는 훈련을 한 것이다. 대만의 반도체 시설을 중국에 넘겨주느니 미국 손으로 파괴하겠다는 게 미국의 구상이다. 좀 더 나아가 중국 때문이 아니더라도 TSMC가 사라지면 미국 반도체 기업에 이익이라고 여기지 않을까 싶다.
미국은 자국 반도체 산업을 키우기 위해 막대한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통과되어 내년부터 시행되는 미국 반도체 지원법(CHIPS for America Act)에 따르면 미국 반도체 기업에 약 500억 달러(약 69조 원)의 보조금을 지원하고 시설투자액의 25%를 세액공제 해준다고 한다. 또 법안 통과를 앞둔 반도체 제조공장 지원법(FABS Act) 역시 반도체 제조공장에 세금 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도체 기업에는 크게 설계만 하는 팹리스와 설계도를 받아 제조만 하는 파운드리가 있다. 현재 미국은 팹리스 분야의 선두에 있지만 파운드리는 대만, 한국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지원법은 모두 파운드리에 집중된다. 즉, 대만, 한국이 차지한 파운드리 영역도 미국 기업이 차지하겠다는 속셈이다.
물론 삼성전자나 대만의 TSMC처럼 미국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약속한 기업들은 자기들도 반도체 지원법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애초에 이 법은 미국 반도체 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법이다. 미국은 지원 대상 선정에 주관적 요소를 포함했는데, 이 때문에 미국 반도체 기업이 대부분의 지원금을 독식하면서 결국 반도체 지원 법안이 ‘미국 반도체 기업 지원법’에 그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 전기차 이어 반도체 지원법도 한국 패싱? 삼성전자 기대 낮아져」, 비즈니스포스트, 2022.9.7.)
이처럼 칩4는 동맹국의 반도체 기업을 털어먹는 정책이며, 반도체가 국내총생산(GDP)의 무려 8%를 차지하는 한국에 있어 재앙이나 다름없다.
반도체 문제뿐 아니라 인플레이션 감축법도 미국이 한국의 뒤통수를 치는 정책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간 한미동맹을 맹목적으로 떠받들던 보수 언론들도 미국을 규탄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조선일보는 9월 7일 자 사설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강행해 현대·기아차가 미국에서 판매하는 전기차에 대해 보조금 지급을 끊은 나라의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닐 것”,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 국가 연대를 요구해왔다. 그래 놓고 실제로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동맹국에 불이익을 주고 있다”라며 바이든 미 대통령을 이례적으로 강하게 비판했다. 또 조선일보는 10월 6일에는 아산정책연구원 최강 원장의 기고 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자유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를 싣기도 했다. 제목 그대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등 미국 우선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미국이 다른 동맹국 반도체 산업을 망가뜨리고 독점적 지위를 얻으면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많은 전문가가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을 완전히 배제할 경우 미국이 입게 되는 피해가 더 크다고 이야기한다. 중국이 반도체를 수입해 전자제품을 만들어 세계에 수출하는 지금의 체제가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에 기업들은 결국 중국과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중국이 반도체 기술력과 생산력까지 자력으로 갖추면 칩4를 비롯해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권은 반도체, 전자제품 산업에서 밀려날 수 있다. (「중국 반도체 실력, 만만하지 않다」, 중앙일보, 2022.7.21.)
전 육군군사연구소장 한설 박사는 8월 14일 「칩4동맹 미국의 구상, 그리고 결과에 대한 전망」이란 글에서 “미국은 이미 자국 내 산업생산 능력을 상실했다. 금융자본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생산 능력을 모두 해외로 이전해 버렸다”, “이제 중국이 성장하면서 그런 정책의 한계를 인식하고 다시 공장을 미국 내로 끌어들이려고” 하지만 “이미 자체적인 산업생산 능력을 상실한 미국이 다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처럼 강력한 제조업 국가가 되어 중국은 능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미국은 칩4 동맹이 아니라 그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중국의 경제적 추격을 따돌리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5) 결론
이처럼 중국, 러시아를 집어삼키는 것도 힘들고 동맹국을 털어먹는 것도 힘든 상황에서 미국 경제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 경제의 미래가 없다는 것은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권 경제의 미래가 없다는 뜻이다. 결정적 파국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터키, 사우디 같은 전통적 친미 나라들은 이미 북·중·러·이란·베네수엘라 등 미국이 적대적으로 대하는 나라들로 갈아탔고, 유럽 나라들도 미국 눈치를 보면서 하나둘씩 갈아탈 채비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북한은 외부 여건과 무관하게 자체 동력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최악의 경제난이라는 90년대 ‘고난의 행군’도 자체 동력으로 극복한 것을 보면 북한의 빠른 성장은 결코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미국 스팀슨 센터의 나탈리아 슬라브니 연구원은 11월 14일 브리핑에서 “(북한 휴대폰) 가입자 수는 3G 서비스가 시작한 2008년 이래 14년간 안정적으로 성장해왔다”라고 소개했다. 북한 경제가 상당히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우리는 뭐든지 나를 알고 상대를 아는 ‘지피지기’를 해야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4년 2월 25일 노동당 8차 사상일꾼대회 연설 「혁명적인 사상공세로 최후승리를 앞당겨나가자」에서 “모든 면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를 하늘과 땅처럼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표현이 단순한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날 것인지 우리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번 9월 8일 시정연설을 굉장히 긴장해서 예의주시하며 대책을 세워야 하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