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예감 402] 영원한 비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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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7-14 16:5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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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긴급작전회의 소집한 미국 육군 소령 2. 하우스만이 취한 두 가지 긴급행동 3. 맥아더는 왜 한강방어선을 시찰했을까? 4. 미국공산당 당원과 조선공산당 당수의 비밀회동 5. 미육군 방첩대가 구축한 재북간첩망
1. 긴급작전회의 소집한 미국 육군 소령
2020년 6월 29일 <자주시보>에 발표한 글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를 집필하던 나에게 수수께끼 같은 의문이 생겼다. 나는 그 글에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 백선엽의 회고록에 들어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인용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서울 신당동 자택에 있었던 그는 38도선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알려주는 전화를 당일 오전 7시경에 받았다고 한다. 누가 백선엽에게 그런 중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는가 하는 문제는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백선엽은 누가 자기에게 그런 정보를 전해주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의문은 백선엽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경 자신에게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을 왜 밝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자료를 뒤진 끝에 나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경 백선엽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 왜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하우스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하우스만이 백선엽에게 긴급작전회의에 나오라는 소집통보전화를 걸었기 때문이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소집해야 하는 긴급작전회의를 왜 하우스만이 소집했을까 하는 의문을 풀려면, 하우스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1995년 서울에서 출판된, 하우스만의 회고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에 따르면, 그는 1946년 7월 말 춘천지구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제8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어 1개월 근무했다. 그는 국방경비대 연대장에서 국방경비대 집행국장으로, 국방경비대사령관 고문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당시 국방경비대사령관 고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한국군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한국군이 일개 미국 육군 대위의 손에서 창설되었다는 치욕의 역사는 하우스만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주한미국군이 철수를 완료하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미국군사고문단이 설치되었던 1949년 7월 1일 하우스만은 소령으로 진급하고 미국군사고문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미국군사고문단 단장이었던 육군 준장 윌리엄 로벗츠(William L. Roberts)는 도꾜와 워싱턴으로 출장을 가서 머무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참모장 하우스만이 단장의 직무를 대행하면서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대령급 또는 중령급 미국군사고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하우스만이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들을 통해 한국군 전체를 지휘통제했음을 말해준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채병덕과 같은 방에서 나란히 책상을 놓고 근무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직접 (한국군의)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을 뿐 아니라, “조직 및 작전과정의 운용을 위한 지원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돼 있었다”고 했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매주 한 차례 군사안전위원회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미국측에서 미국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벗츠와 참모장 제임스 하우스만이 참석했고, 한국측에서 대통령 이승만, 국방장관 신성모,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참석했다. 하우스만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을 자기 방처럼 드나들었는데, 이승만은 한국군 육군참모총장에 누구를 임명하면 좋겠는가 하는 고위급 인사문제까지 하우스만에게 물어보고 결정했다. 이런 사정은 이승만이 하우스만의 꼭두각시였고, 채병덕은 하우스만의 허수아비였음을 말해준다.
하우스만은 극악무도한 반공광신자였다. 토벌대사령관 백선엽은 사살당한 남조선인민유격대 지휘관의 목을 20리터들이 휘발유통에 넣어 하우스만에게 보냈고, 하우스만은 휘발유통 속에서 얼굴이 퉁퉁 부어 누군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된 피살자의 목을 건져 올려 자신이 직접 신원을 확인하는 잔인성을 드러냈다.
하우스만은 6.25 전쟁 중인 1951년에 미국 국방부 코리아정보과로 잠시 전근했다가 이듬해 주한미국군사단 고문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1956년 3월에 주한미국군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68년에 전역하면서 주한미8군사령관 특별고문에 임명되어 1981년까지 그 직위에서 한국군을 사실상 지휘통제했다.
한국군을 지휘통제한 미국군사고문단의 내부사정을 파악해야 6.25전쟁 개전상황에 그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 수 있는데, 하우스만이 회고록에 서술한 미국군사고문단의 내부사정은 다음과 같다.
미국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벗츠는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하지 못한 채 군복을 벗었다. 전역명령을 받은 그는 1950년 6월 22일 일본 도꾜종합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던 아내를 퇴원시키고 아내와 함께 미국행 수송선에 올랐다. 한국군을 지휘통제하는 미국군사고문단 단장은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 수송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전역한 단장의 빈자리를 채워 한국군을 지휘통제해야 할 미국군사고문단 부단장(육군 대령) 스털링 라이트(W. H. Sterling Wright)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가족을 바래주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일본 도꾜에 있었다.
위에 서술한 사정을 보면, 하우스만이 한국군을 지휘통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의 운명은 일개 미국 육군 소령의 손에 놓여 있었다.
하우스만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중대한 정보를 어떤 경로로 파악했을까? 1950년 6월 24일 밤 미국군사고문단 장교들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은 한국군 장교구락부 개설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사교춤을 즐기다가 각자 집에 돌아가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하우스만은 예외였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폐결절에 걸려 도꾜종합병원에서 치료받던 그의 아내 버트가 1950년 6월 11일에 퇴원하여 남편을 만나기 위해 서울행 C-54 수송기를 탔는데, 이륙하기도 전에 고장이 나는 바람에 수송기를 고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녀가 긴급수리를 받은 수송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내린 때는 1950년 6월 24일 오후였다. “아직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아내를 집에 데리고” 간 하우스만은 한국군 장교구락부 연회에 나갈 수 없었다. 하우스만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5시쯤 한국군 육군본부에서 걸려온 긴급전화를 받고 잠에서 깼다. 그가 자기 집에서 약 100m 떨어진 육군본부 청사로 달려갔더니,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채병덕의 직속상관인 국방장관 신성모는 어디에 있는지 전화연락이 되지 않았고, 채병덕의 작전참모인 육군 대령 장창국은 집을 이사하는 바람에 새 주소를 알지 못해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한국군 최전방 전투부대 지휘관들은 무선통신을 통해 38도선 무력충돌상황을 채병덕에게 무질서하게 보고했다. 공식보고체계에 따라 제대로 보고하려면,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단 정보고문이 전황보고를 취합, 정리하여 하우스만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미국군사고문들은 서울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난장판에서 하우스만이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진 1>
2. 하우스만이 취한 두 가지 긴급행동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경 하우스만은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접경지대에서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으로 판단했다가, 약 3시간 뒤에는 초기판단을 수정하여 조선인민군이 “전면적인 공격으로 보이는”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판단한 하우스만은 두 가지 긴급행동을 취했다.
1) 하우스만이 취한 긴급행동은 미국군사고문단을 일본 도꾜로 철수시키는 일이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오전 백선엽과 함께 경기도 파주에 나가 전황을 파악하던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이드 로크웰은 급히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선을 떠나 서울로 돌아갔다. 하우스만이 미국군사고문단에게 철수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긴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하우스만은 미국군사고문단에게 왜 도꾜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을까? 이 의문을 풀어줄 해답은 하우스만의 회고록에서 찾을 수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미국군사고문단은 즉시 도꾜로 철수하라는 미국 원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명령이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하달되었다고 한다. 이런 정황은 맥아더가 6.25전쟁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이미 알았고, 전쟁에서 한국군이 패주할 것이라는 정보도 이미 알았음을 말해준다. 맥아더가 그런 정보를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하는 문제는 개전전황을 파악하는 데서 중요하므로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주한미국대사관은 서울에 체류하는 미국인들을 급히 일본 도꾜로 대피시켰는데,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미국군사고문단도 함께 대피시키려고 했다. 서울에 체류하는 미국인 2,000여 명은 수송기 또는 수송선을 타고 이틀에 걸쳐 일본으로 대피했다.
그런 와중에서 하우스만은 주한미국대사 존 무쵸(John J. Muccio)와 상의한 끝에 미국군사고문단이 “한국군에 남아있는 것이 한국군의 사기를 위해 필요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한국군에 남기를 자원하는 군사고문은 남아도 된다고 명령했다. 그렇게 되어 미국군사고문단 소속 장병 487명 중에서 약 32명이 남았다.
2) 하우스만이 취한 또 다른 긴급행동은 개전전황을 상부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긴급작전회의를 소집한 하우스만은 그 자리에 주한미국대사 무쵸도 불렀다. 개전전황을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하우스만은 급한 김에 개전전황을 자기가 아는 대로 무쵸에게 설명했다. 하우스만의 설명을 들은 무쵸는 당일 오전 10시경 워싱턴에 있는 미국 육군성에 긴급히 타전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긴다. 하우스만은 왜 무쵸를 통해 상부에 개전전황을 보고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 의문을 풀어줄 해답은 하우스만의 회고록에서 찾을 수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1949년 6월 30일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주한미국군 제5보병연대가 하와이로 철수한 직후, 미국군사고문단은 독자적인 지위를 상실하고 주한미국대사관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사정이 그렇게 바뀌었으므로, 하우스만은 자기가 직접 육군성에 보고하지 않고 무쵸를 통해 보고한 것이다. <사진 2>
3. 맥아더는 왜 한강방어선을 시찰했을까?
서울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한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28일 오전 서울 전역을 점령했다. ‘서울해방작전’을 완료한 그들은 진격을 멈췄다. 2020년 6월 29일 <자주시보>에 발표한 나의 글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에 서술한 것처럼, ‘서울해방작전’은 38도선 이남전역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였던 서울을 10일 동안 ‘해방’하고 이승만의 항복을 받아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해방작전’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한강도하장비를 가져오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진격하려고 했다면, 한강, 금강, 낙동강을 건널 도하장비를 가져왔어야 한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30분경 한국군 공병부대는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조선인민군은 서울에서 진격을 멈추고 한강을 건너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한국군은 한강 이남으로 패주하면서 인도교를 폭파해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자초했다. 그런데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폭파되지 않은 한강 철교의 철로 위에 널빤지를 깔면 조선인민군 전차부대가 얼마든지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는 작전계획에 따라 서울을 점령한 후 진격을 멈추고 서울에서 3일을 보냈다.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은 3일 동안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맥아더가 한강방어선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용기를 타고 도꾜를 출발한 맥아더가 경기도 수원비행장에 내린 시각은 1950년 6월 29일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내리자마자 곧장 군용차를 타고 북상하여 한강방어선으로 나갔다. 그의 참모들은 한강방어선 시찰이 매우 위험하다고 만류했으나 맥아더는 듣지 않았다. 한강방어선에 도착한 맥아더가 언덕을 오를 때, 주변에 포탄이 떨어졌다. 낙탄각도가 조금 더 예리했으면, 맥아더는 즉사했을지 모른다.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긴다. 맥아더는 포탄이 날아오는 한강방어선에 왜 위험을 무릅쓰고 나타난 것일까?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맥아더의 한강방어선 시찰이 백전로장의 용감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는 겁쟁이였다. 이를테면, 태평양전쟁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던 1942년 3월 11일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하자, 마닐라에 있던 맥아더는 어뢰정을 타고 이틀에 걸쳐 민다나오로 꽁무니를 뺏고, 민다나오에서 다시 B-17 폭격기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으로 달아났다. 맥아더가 제 목숨을 건지려고 멀리 도망치는 바람에 약 70,000명에 이르는 미국군과 필리핀군이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히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그런 겁쟁이 맥아더가 위험을 무릅쓰고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것은 결코 용감성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맥아더는 패주를 거듭하고 있는 한국군의 사기를 올려주려고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것도 아니었다. 맥아더의 한강방어선 시찰은 은밀한 행동이었으므로, 한국군 전투부대들은 그가 한강방어선에 다녀갔는지 몰랐다.
1950년 6월 27일 오전 맥아더는 육군 소장 존 처치(John H. Church)를 전선사령관으로 임명해 경기도 수원에 보냈다. 처치는 ‘전방지휘연락단(Advanced Command\and Liaison Group)’이라는 명칭의 전선사령부를 수원에 설치하고 전쟁을 지휘했다. 그래서 맥아더는 도꾜 집무실에 앉아서 전선사령관 처치로부터 수시로 전황보고를 받아보면서 작전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맥아더가 굳이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왜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일까? 그 까닭은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나는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군사고문단이 도꾜로 철수하라는 맥아더의 대피명령이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내려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맥아더가 전쟁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미리 알았다고 서술했는데, 거기에 더하여 맥아더는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까지 알았던 것이다.
당시 ‘서울해방작전’에 관한 극비정보를 아는 조선의 최고위급 인사들은 손에 꼽을 만큼 극소수였다. 조선의 최고위급 인사들만 아는 극비정보를 맥아더가 알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의 간첩망이 조선의 최고위층에 침투해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맥아더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대북간첩망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947년 9월 18일에 창설된 미국 중앙정보국은 적국에 독자적인 간첩망을 구축할 능력을 아직 갖지 못했고, 따라서 1950년 6월 당시에는 정보분석에 집중하고 있었다. 2007년에 기밀해제된 미국 중앙정보국의 2급 비밀문서 ‘비밀공작사(Clandestine Service History)’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국이 독자적인 간첩망을 북에 구축하기 시작한 때는 1950년 9월 말경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1950년 5월 15일에 작성한, ‘북조선 정권의 현재 능력’이라는 제목의 비밀보고서(ORE 18-50)는 조선인민군이 38도선에서 무력을 증강하고 있다는 정보에 근거하여 그들이 서울을 점령하는 제한적이고, 단기적인 군사작전을 전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이것은 조선인민군의 ‘서울해방작전’을 예측한 중요한 정보였지만, 중앙정보국을 신뢰하지 않는 맥아더가 그들이 작성한 비밀보고서를 보고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맥아더에게 알려준 간첩망은 따로 있었다. <사진 3>
1945년 12월 어느 날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도꾜에서 날아온 수송기 한 대가 착륙했다. 수송기 탑승자들 중에서 유난히 시선을 집중시킨 사람은 미국 육군 소위 군복을 입은 조선여자였다. 조선여자가 미국 육군 군복을 입고 서울에 나타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현미옥이고, 미국 이름은 앨리스 현(Alice Hyun)이다. 당시 미국의 점령지였던 남조선에서 현미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녀가 장차 엄청난 사건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 육군 소위 현미옥은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G-2)에 배속되었다.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을까? 정보참모부 지휘관은 미국 육군 대령 쎄실 니스트(Cecil W. Nist)였다. 그의 밑에는 미국 육군 장교 10명과 사병 16명, 육군성 군속 45명, 조선인 군속 363명이 있었다. 정보참모부는 행정과, 남조선과, 북조선과, 군사실, 정치부, 평양연락사무소를 두었다. 정보참모부 관하에는 방첩대분견대(Counterintelligence Corps Detachment)와 민간통신검열단(Civil Communication Intelligence Group)이 이었다.
방첩대(CIC)분견대는 비밀공작과 간첩활동을 수행했는데, 1946년 4월 제971방첩대분견대로 개편되었다. 제971방첩대분견대는 서울에 있는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관하 부대이면서도 도꾜에 있는 미원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의 지휘를 받았다. 다시 말해서, 맥아더는 제971방첩대분견대가 구축한 간첩망을 통해 남북조선의 내부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점령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하던 1949년 5월 미점령군에 속한 제971방첩대분견대도 철수했지만, 맥아더는 서울에 특수조사부(Special Investigation Section)와 코리아연락실(Korea Liaison Office)을 설치하고 공작망과 간첩망을 계속 운영했다. 현미옥이 배속된 민간통신검열단은 남조선에서 오가는 우편물과 전보를 검열하고, 전화통화를 도청하는 민간사찰부대였다. 그런데 현미옥은 누구인가?
현미옥은 재미동포 1세들이 사탕수수농장에서 고된 이민생활을 하고 있었던 1903년 미국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현순(1880~1968)은 1911년 가족을 데리고 하와이에서 서울로 돌아갔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현순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1919년 4월 이동녕, 손정도와 함께 임시정부수립에 동참했다. 사회주의성향을 지닌 독립운동가인 현순은 1919년 9월 김철훈을 중심으로 로씨야 이르꾸츠크에서 창당된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청년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에 머물던 현미옥은 초기 임시정부에 참가한 사회주의성향의 청년들이었던 박헌영, 여운형과 함께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26년 현미옥은 가족과 함께 미국에 돌아가 조선독립운동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사회주의운동이 전성기를 맞았던 1930년대 중반 미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30년대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영향을 받은 재미독립운동가들이 미국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45년 12월 미국 육군 소위 군복을 입고 서울에 나타나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 배속된 현미옥은 미국공산당원이었다. 서울에서 현미옥은 1920년대초 상하이에서 친분을 쌓았던 박헌영을 남몰래 찾아갔다. 1945년 8월 24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당수였다. 기록에 의하면, 현미옥은 1946년 1월 11일부터 박헌영을 여러 차례 만났다. 미국공산당원과 조선공산당 당수의 특이한 만남이었다. 현미옥은 박헌영에게 미국공산당에 소속된 재미동포당원들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조선공산당 일지’에 따르면, 1946년 3월 2일 현미옥은 미점령군에 배속되어 서울에 체류하던 미국인 미국공산당원 3명과 함께 박헌영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미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연대협력문제를 협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미옥은 박헌영이 자기 직속상관인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지휘관 쎄실 니스트의 비밀지령을 받는 제971방첩대분견대 소속 거물간첩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박헌영이 제971방첩대분견대에 포섭된 거물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1946년 8월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지휘관 쎄실 니스트는 현미옥이 민간통신검열단에 배속된 이후 통신검열이 급격히 하락했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현미옥이 민간통신검열단에서 근무할 조선인 통역자와 번역자를 고용하는 일에 개입하여 공산주의자들을 고용시킴으로써 민간통신검열단 임무를 “파괴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고 하면서, 현미옥을 “제거했다”고 말했다. 제거라는 말은 민간통신검열단에서 축출하고, 강제전역시켰다는 뜻이다. 강제전역을 당한 현미옥은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다. 1946년 말부터 현미옥을 비롯한 재미동포 미국공산당원들은 체스꼬슬로벤스꼬 프라하에 체류하는 고고학자 한흥수를 통해 북과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미국에는 광란적인 반공선풍이 몰아쳤다. 1947년 3월 21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르먼(Harry S. Truman)은 연방정부 공직자들의 사상을 검열하는 대통령행정명령을 발동했다. 광란적인 반공선풍 속에서 수많은 미국공산당원들이 ‘소련의 간첩’으로 몰려 형벌을 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1940년대 말에서 1951년까지 기간에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미국공산당원 약 1,500명을 공갈, 협박하여 자기들에게 협력하는 첩자로 만들었다.
한흥수를 통해 북과 연락하던 재미동포 미국공산당원들이 광란적인 반공광풍 속에서 무사할 리 없었다. 미국 연방수사국은 현미옥에게 미국공산당에서 탈당하고 자기들에게 협력하면 석방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공갈, 협박했던 것이 뻔한데, 불행하게도 현미옥에게는 형벌을 받더라도 자기의 사상을 지키려는 신념과 의지가 없었다. 저들의 공갈과 협박을 이기지 못한 현미옥은 미국 연방수사국을 거쳐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간첩망에 인입되었다. <사진 4>
5. 미육군 방첩대가 구축한 재북간첩망
1946년 9월 4일 미군정청은 박헌영 체포령을 내렸다. 하지만 박헌영 체포령은 그를 평양에 침투시켜 제971방첩대분견대의 재북간첩망을 활성화하려는 자작극이었다. 미군정청은 박헌영 체포령을 내렸으나, 제971방첩대분견대는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어디론가 잠적했던 박헌영은 1946년 10월 6일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지휘관 쎄실 니스트의 월북지령을 받고 강원도 홍천에 있는 38도선을 넘어 평양에 들어갔다.
박헌영이 월북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1946년 11월 12일 서울에서는 한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 제13차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박헌영이 체포망을 뚫고 월북한 것을 막지 못한 책임을 추궁당한 장택상은 이렇게 말했다. (장택상은 미군정청 경무총감실 부총감 겸 수도관구 경찰청장이었다.) “나는 박헌영 체포명령을 받지 못했는데, 니스트 대령으로부터 박(헌영)을 찾으라는 명령은 받았다. 그런데 하지(미점령군사령관)는 니스트 대령이 하는 일에 결코 관여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1946년 당시 미군정청 검찰총장이었던 이인은 1967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남로당 간부 80여 명을 검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하지는 다른 사람이야 (검거해도) 괜찮은데 박헌영(을 검거하는 것)은 잠시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말하고, 4~5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하지가 박헌영 체포를 보류하고 있었던 기간에 박헌영은 체포망과 경계망을 뚫고 월북했다.
평양에 침투한 박헌영은 1948년 6월 자기 하수인 서득언(남로당 경기도당 조직부장)을 통해 니스트의 비밀지령을 받았다. 니스트는 비밀지령에서 현미옥을 비롯해 몇 사람을 유럽을 통해 북에 들여보내겠으니, 그들의 입국을 보장해주고, 입국한 뒤에는 간첩활동을 할 수 있도록 조건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1949년 1월 현미옥은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침투지령을 받고 평양에 가기 위해 프라하에 도착했다. 이경선이 동행했다. 이사민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이경선도 현미옥처럼 미국공산당원이었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크게 고무된 이경선은 1948년 11월 15일 미국공산당 조선인 당원대표의 명의로 김일성 수상(당시 직책)과 박헌영에게 비밀서신을 보냈다. 이경선은 비밀서신을 서울에 가는 남궁요설에게 주면서, 임화에게 전해달고 부탁했다. 박헌영의 추종자였던 임화는 좌익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기획실장이었다.
그런데 미육군 방첩대가 1949년에 작성한 비밀문서에 따르면, 임화는 이강국과 함께 제971방첩대분견대에 포섭된 간첩이었다. 임화처럼 박헌영의 추종자였던 이강국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이었다. 임화를 통해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에게 비밀서신을 보내려던 이경선은 임화가 제971방첩대분견대 소속 간첩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임화는 1947년 8월 자기에게 내려진 체포령을 피해 잠적한 척하다가 1947년 11월 20일 월북했기 때문에 전달자가 이경선의 비밀서신을 임화에게 전해주려고 서울에 갔던 1948년 11월 임화는 서울에 없었으나,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평양에 전해졌다. <사진 5>
1948년 12월 미국 연방수사국은 워싱턴주 씨애틀에서 미국공산당원 이경선을 체포했다. 현미옥과 마찬가지로 이경선도 중형을 받더라도 자기의 사상을 지키려는 신념과 의지를 갖지 못했다. 저들의 공갈과 협박을 이기지 못한 이경선은 미국 연방수사국을 거쳐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간첩망에 인입되었다.
1949년 1월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침투지령을 받고 평양에 가기 위해 프라하에 도착한 현미옥과 이경선은 체스꼬슬로벤스꼬 정부당국에 북조선에 망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체스꼬슬로벤스꼬 국가안전기관은 망명동기가 분명하지 않은 그들을 의심했다. 조선의 사회안전성은 현미옥과 이경선의 망명동기가 분명하지 않다는 체스꼬슬로벤스꼬 국가안전기관의 통보를 받고 그들의 입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헌영은 사회안전성의 입북불허결정을 무시하고, 외무상 직권으로 그들에게 입국사증을 내주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되어 현미옥과 이경선은 프라하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입북했다. 평양에 활동거점을 마련한 현미옥은 박헌영의 후견을 받아 조선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 배치되었다. 박헌영은 현미옥의 직속상관이었다. 박헌영의 후견을 받은 이경선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부터 1968년까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부국장으로 근무했고, 1980년대 중반에 탈북, 입남한 신경완은 평양에 들어간 현미옥과 이경선이 프라하에 자주 편지를 보냈고, 단파라디오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신경완의 회고담에 따르면, 재일본조선인총련맹에서 활동하던 조창영이 아내와 함께 1949년 11월 중국 베이징을 거쳐 입북했다고 한다. 박헌영의 후견을 받은 조창영은 대외문화련락위원회에서 근무하다가 조국보위후원회로 옮겨갔다. 박헌영은 조창영을 여러 차례 만났고, 조창영은 자기보다 약 한 달 전에 입북한 현미옥과 이경선을 2~3차례 만났다. 그런데 심경의 변화를 겪은 조창영은 1950년 3월 사회안전성에 자수하여 자신이 미육군 방첩대의 입북지령을 받고 귀국했다고 자백했다.
1950년 3월 현미옥과 이경선은 사회안전성을 찾아가 동유럽을 다녀오려는데 해외여행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사회안전성은 해외여행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1950년 7월 현미옥과 이경선은 평양에 있는 이강국의 집에서 두 차례 비밀회합을 갖고 간첩활동을 모의했다. 1950년 가을 어느 날 박헌영은 현미옥과 이경선에게 동유럽여행을 허가해주도록 사회안전성에 요청했다. 사회안전성 요원들은 그 두 사람을 미행하다가 경유지인 모스크바공항에서 그들의 짐을 수색했다. 그들의 짐에서는 군사기밀자료를 비롯한 비밀자료들이 나왔다.
6.25전쟁 이전 미육군 방첩대는 거물간첩 박헌영을 우두머리로 삼은 재북간첩망을 구축하고 비밀정보를 빼냈다. 박헌영이 재북간첩망을 통해 수집하여 미육군 방첩대에 보고한 비밀정보들 중에는 ‘서울해방작전’에 관한 극비정보도 있었다. 그 극비정보는 맥아더의 손을 거쳐 미국 육군성에 전해졌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보고되었다.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격화되고 내전이 임박하였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들이 계속 나타났는데도, 트루먼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더라도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서울해방작전’의 극비정보를 알았기 때문에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그 대신 트루먼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중국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해방작전’에 돌입할 것을 우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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