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예감 390] 접동새 울음 속에 들려오는 피묻은 혼의 하소연 > 정세분석

본문 바로가기
정세분석

[개벽예감 390] 접동새 울음 속에 들려오는 피묻은 혼의 하소연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4-13 16:02 댓글0건

본문

[개벽예감 390] 접동새 울음 속에 들려오는 피묻은 혼의 하소연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자주시보 

<차례>

1. 김포공항에 착륙한 비밀공작항공기

2. 피어 드 실바가 선정한 장면과 백선엽

3. 전면에 나선 카터 맥루더와 월터 매카너기

4. 접동새 울음 속에 들려오는 피묻은 혼의 하소연

 

 

1. 김포공항에 착륙한 비밀공작항공기

 

1960년 5월 29일 오전 7시 30분, 김포공항 활주로에 DC-4 4발엔진 프로펠러 항공기 한 대가 조용히 착륙했다. 항공기 기체에 새겨진 씨빌 에어 트랜스포트(Civil Air Transport)라는 항공사 이름이 선명했다. 

 

김포공항에서 취재한 <경향신문> 기자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상하게도 그 비행기에는 기장 1명과 부기장 2명 이외에 다른 승무원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44인승 항공기에 왜 승무원이 한 사람도 없었을까? 이 의문은 그로부터 56년이 지난 뒤에 풀렸다. 그날 김포공항에 착륙한 DC-4 항공기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소속이었다. 겉모습을 보면 그 항공기를 운용하는 항공사는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민용항공사였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 항공사는 미국 중앙정보국이 해외비밀공작을 위해 민용항공사로 위장시킨 특수항공거점이었다. 1950년 8월 23일 씨빌 에어 트랜스포트를 매입한 미국 중앙정보국은 그 항공사를 비밀공작항공사로 만들었다.    

 

그런데 미국 중앙정보국 소속 DC-4 항공기가 왜 1960년 5월 29일 김포공항에 착륙했을까? 이 의문은 항공기에 오른 탑승객이 누구였는지, 그 항공기의 종착지가 어디였는지를 알면 자연히 풀린다. 항공기에 오른 탑승객은 이승만과 프랜체스카 도나 부부밖에 없었고, 항공기의 종착지는 미국 하와이였다.  

 

당시 언론매체들은 하와이한인협회장 최백렬이 이승만에게 도미초청장과 전세항공기를 보냈다고 보도했지만, 그런 보도는 미국 중앙정보국이 날조, 유포한 허위사실을 그대로 실은 오보였다. 이승만 자신도 자기와 처를 태우고 하와이로 날아간 그 항공기가 미국 중앙정보국 소속 특수항공기인줄 몰랐다. 더욱이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휴양한 뒤에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는 당시 과도정부수반 허정의 말만 믿고 하와이로 떠났지만, 그의 하와이행은 미국 중앙정보국이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추진해온 이승만제거공작의 결정판이었다.  

 

위와 같은 은폐된 진실을 파헤치면, 이승만이 자발적으로 하와이 망명을 선택했다는 기존 인식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당시 미국의 이승만제거공작이 진행되고 있는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이승만이 하와이로 떠난 소식을 망명이라고 보도한 오보가 정설처럼 굳어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승만의 하와이행은 해외망명이 아니었고, 미국이 그를 하와이로 유인, 납치한 비밀공작을 해외망명으로 위장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에 의해 하와이로 유인, 납치되는 줄도 몰랐고, 자신이 하와이한인협회장의 도움을 받아 하와이로 잠시 휴양을 떠나는 것으로 착각했다. <사진 1> 

 

▲ <사진 1> 위의 사진은 1960년 5월 29일 오전 이승만이 부축을 받으며 항공기 탑승대에 오르는 장면이다. 당시 84세인 그는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오를 정도로 노쇠한늙은이였다. 이승만은 자기 처 프랜체스카 도나와 함께 DC-4 항공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갔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기와 처를 태우고 하와이로 날아간 그항공기가 미국 중앙정보국 소속 특수항공기인줄 몰랐다. 더욱이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휴양한 뒤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는 당시 과도정부수반허정의 말만 믿고 하와이로 떠났지만, 그의 하와이행은 미국 중앙정보국이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추진해온 이승만제거공작의 결정판이었다. 이승만의 하와이행은 해외망명이 아니었고, 미국이 그를 하와이로 유인, 납치한 비밀공작을 해외망명으로위장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에 의해 하와이로 유인, 납치되는 줄도 몰랐고, 자신이 하와이한인협회장의 도움을 받아 하와이로 잠시휴양을 떠나는 것으로 착각했다.  

 

주목되는 것은, 미국의 이승만제거공작을 외면하고, 1960년 4월에 일어난 역사적 사변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1960년 4월에 일어난 역사적 사변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고 알고 있지만, 그런 인식내용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하는 것은 미국이 그 역사적 사변에 교묘히 편승하여 이승만제거공작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이승만제거공작을 분석, 고찰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인데,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승만 정권의 성격에 관한 문제다. 흔히 이승만 독재정권이라고 하지만, 독재라는 일반적 개념으로는 그 정권의 성격을 정확히 인식할 수 없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에 일어난 제주민중항쟁과 여수순천민중항쟁을 대량학살로 짓밟은 미군정의 배후조종에 의해 수립된 친미정권이며, 1950년 국민보도련맹학살사건과 6.25전쟁민간인학살사건을 자행한 파쇼정권이다. 2010년 12월 23일 당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은 언론대담에서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대량학살사건을 10년 동안 조사한 자신의 소감을 말하면서 그 정권이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추산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승만은 민간인 100만 명을 학살한 대참사의 책임을 지고 극형을 받았어야 했다. 그처럼 반민족적이며, 극악무도한 정권은 독재정권이 아니라 친미파쇼정권으로 규정해야 마땅하다. 

 

둘째, 1960년 4월에 일어난 역사적 사변의 성격에 관한 문제다. 사람들은 그 역사적 사변을 4.19혁명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사회과학적 분석으로 1960년 4월의 역사적 사변을 재조명하면, 그 사변은 혁명이 아니라 민중항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보인다.   

 

혁명과 민중항쟁은 구분되어야 한다. 민중항쟁은 혁명과정 중에 발생하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사변들 가운데 하나다. 사람들은 폭력이라는 개념을 폭행사건이나 폭력범죄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인식하지만, 원래 폭력이라는 것은 물리력의 폭발을 뜻하는 가치중립적 개념이므로, 폭력이라는 말을 폭행사건이나 폭력범죄에 결부시키는 것은 그릇된 언어폐습이다. 1960년 4월의 역사적 사변은 이승만 친미파쇼정권의 폭정 아래서 12년 동안 억눌린 민중이 정의의 폭력투쟁으로 그 정권을 무너뜨린 위대한 사변이었다. 1960년 4월의 역사적 사변을 혁명이 아니라 민중항쟁으로 인식해야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혁명은 정권교체를 실현하고, 사회체제를 변혁하는 급진적인 변화이다. 그런데 4월 민중항쟁은 자유당 정권을 민주당 정권으로 바꾼 형식적인 정권교체를 실현하였을 뿐이다. 실질적인 정권교체를 실현하지 못했으므로, 사회체제를 변혁시킬 수 없었다. 4월 민중항쟁으로 등장한 민주당 정권은 민주개혁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으나, 당내파쟁에만 골몰하면서 민중이 제기한 민주개혁의 요구를 외면하다가 11개월 만에 5.16군사정변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민주당 정권이 해놓은 일은 진보정치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1961년 7월 3일 반공법을 제정한 것밖에 없다. 1960년 4월의 역사적 사변이 체제변혁은커녕 실질적인 정권교체도 실현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정권교체에 그쳤다는 사실은 그 사변이 혁명이 아니라 민중항쟁의 전형이었음을 보여준다.   

 

(2) 혁명은 혁명사상에 의해 일어난다. 정권교체와 체제변혁을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사회력사발전의 역사적 전망을 제시하는 혁명사상이 없으면, 자연발생적인 민중항쟁은 일어날 수 있어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1960년 4월의 역사적 사변은 정권교체와 체제변혁의 실현경로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사회력사발전의 역사적 전망을 제시하는 혁명사상이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민중항쟁의 전형이었다. 

 

(3) 혁명은 조직화된 혁명세력에 의해 일어난다. 만일 조직화된 혁명세력이 없으면, 자연발생적인 민중항쟁은 일어날 수 있어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1960년 4월의 역사적 사변은 조직화된 혁명세력이 존재하지 않은 가운데,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급진적이고 폭발적인 민중항쟁의 전형이었다.  

 

 

2. 피어 드 실바가 선정한 장면과 백선엽

 

4월 민중항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59년, 다시 말해서 미국 중앙정보국이 이승만제거공작에 착수하기 전, 백악관이 나서서 이승만사퇴권유공작을 추진했다. <뉴시스> 2015년 4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대통령 드와잇 아이젠하워는 1959년 여름 연방하원의원 월터 저드를 밀사로 서울에 파견하여 이승만을 만나게 했다고 한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서기관 윌리엄 왓츠의 회고담에 따르면, 경무대(청와대의 당시 명칭)를 방문한 월터 저드는 이승만에게 후임자를 정하고 사퇴할 것을 권고한 서한을 전하면서 구두로 자진사퇴를 권유했으나, 이승만은 사퇴권유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승만사퇴권유공작이 성과를 가져오지 못하자, 아이젠하워는 미국 중앙정보국에게 이승만을 제거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대통령의 비밀지령에 따라 미국 중앙정보국은 이승만제거공작에 착수했다. 미국 중앙정보국 서울지부(당시는 한국지부가 아니라 서울지부로 불렸음)가 현지공작거점으로 되었다. 1959년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 부국장이었던 리처드 헬름즈는 유럽에서 대소련비밀공작을 수행해온 비밀공작전문가 피어 드 실바를 중앙정보국 서울지부장으로 급파했다. 여기서 급파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은, 1958년에 미국 중앙정보국 서울지부장으로 임명된 웨일즈 넬슨이 1959년에 피어 드 실바로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지부장으로 부임한 피어 드 실바는 이승만제거공작을 두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 

 

(1) 피어 드 실바는 이승만을 제거한 뒤 차기 대통령으로 내세울 적임자를 선정했다. 1960년 4월 당시 한국군 연합참모본부 총장(합동참모본부 의장의 당시 명칭)이었던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9년 미국 중앙정보국 서울지부장으로 부임한 피어 드 실바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장면을 “자주 만나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했다. 미국 중앙정보국 서울지부장과 한국 부통령의 깊은 관계는 돈독한 친분관계라는 뜻이 아니라,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한 뒤 차기 대통령으로 내세울 적임자로 장면을 선정했다는 뜻이다. 1959년 8월 1일 미국 중앙정보국이 작성한 1급 비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국은 노쇠하여 대통령 직무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된 이승만을 사퇴시킬 헌법조항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지난날 극단적인 수단까지 동원한 경력이 있는 자유당 강경파가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장면 부통령의 대통령직 계승을 가로막을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이것은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고 장면을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정치음모를 이미 1959년 8월 이전에 꾸몄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4월 민중항쟁이 일어나 이승만 친미파쇼정권이 붕괴위기에 빠졌을 때, 피어 드 실바는 장면을 차기 대통령으로 만드는 비밀공작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60년 4월 25일 피어 드 실바는 이승만에게 전화를 걸어 사퇴압박을 가했다. 그런데 전화통화에서 이승만은 장면을 비롯한 천주교세력이 “폭동을 배후에서 선동했다”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친미파쇼정권에서 실권 없는 부통령으로 맴돌던 장면은 4월 민중항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던 1960년 4월 23일 갑자기 사퇴성명을 발표했고, 국회는 그의 사표를 4월 25일에 수리했다. 장면이 부통령직에서 전격사퇴한 것은 그를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피어 드 실바의 비밀공작에 따른 행동이었다. 만일 장면이 이승만 친미파쇼정권의 부통령으로 남아 있다가 그 정권이 4월 민중항쟁으로 무너지면, 친미파쇼정권의 고위관리들이 모조리 사법처리를 받아야 했던 것처럼, 부통령 장면도 당연히 법정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장면을 차기 대통령으로 내세우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래서 피어 드 실바는 4월 민중항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장면을 사퇴시킨 것이다. <사진 2>     

 

▲ <사진 2> 위의 사진은 1960년 4월 23일 당시 부통령 장면이 사퇴성명을 발표한 직후, 취재진과 담화하는 장면이다. 장면이 부통령직에서 전격사퇴한 것은 그를 차기대통령으로 만들려는 피어 드 실바의 비밀공작에 따른 행동이었다. 피어 드 실바는1959년에 미국 중앙정보국 서울지부장으로 부임하여 이승만제거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이승만은 주한미국대사 매카너기와 피어 드 실바에게 장면을 '폭동을 배후에서 교사, 선동한 불순분자'로 몰아가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런 상황에서 만일 장면이 이승만 친미파쇼정권의 부통령으로 남아있으면, 그는 법정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장면을 차기 대통령으로 내세우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래서 피어 드 실바는 4월 민중항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장면을 사퇴시킨것이다.  

 

1960년 6월 19일 아이젠하워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국빈방문했는데, 그가 방한하기 직전 국무부는 주한미국대사에게 보낸 비밀전문에서 장면을 아이젠하워 옆에 앉히라는 지령을 내렸다. 장면을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은 차질 없이 수행되었고, 마침내 1960년 8월 18일 장면은 내각책임제 국무총리에 피선되어 대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2) 미국 중앙정보국 서울지부장으로 부임한 피어 드 실바는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정변을 일으키려는 비밀공작을 벌였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60년 4월 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피어 드 실바는 당시 한국군 최고지휘관이었던 백선엽을 “자주” 만났는데, 4월 민중항쟁 며칠 전에는 백선엽에게 “(이승만을 제거하는 군사정변에) 나서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고 한다. 그런 놀라운 권유를 받은 백선엽은 자신이 군사정변에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중에 4월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미국 중앙정보국 서울지부장이 한국군 최고지휘관에게 군사정변을 권유한 것은, 군사정변으로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비밀공작이 추진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 중앙정보국은 미국에게 순종하지 않는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군사정변을 배후조종하거나 정부수반을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테면, 미국 중앙정보국은 1953년 8월 19일 군사정변을 배후조종하여 이란의 모싸덱정권을 전복시켰다. 1954년 6월 27일 군사정변을 배후조종하여 과떼말라의 아르벤즈정권을 전복시켰다. 1960년 9월 5일 군사정변을 배후조종하여 민주꽁고의 루문바정권을 전복시켰다. 1961년 5월 30일 국가수반을 암살하여 도미니까의 뜨루히요정권을 전복시켰다. (1961년 5월 16일 한국에서 일어난 군사정변의 배후조종자는 미국 중앙정보국이 아니라 주한미국군 정보기관이었다) 1963년 8월 23일 정부수반을 암살하여 남부윁남의 고딘디엠정권을 전복시켰다. 1964년 4월 1일 군사정변을 배후조종하여 브라질의 굴라정권을 전복시켰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기간에 미국은 자기에게 순종하지 않는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군사정변을 배후에서 조종하거나 정부수반을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1990년대 이후에는 자기에게 순종하지 않는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무력침공을 감행하거나 경제제재를 가중시키거나 핵전쟁도발위협을 가하는 만행을 세계 각지에서 저지르고 있다. 그처럼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미국이야말로 제국주의국가의 전형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전면에 나선 카터 맥루더와 월터 매카너기 

 

피어 드 실바는 백선엽을 앞세운 군사정변을 배후조종하여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우유부단한 백선엽이 머뭇거리던 중에 4월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이승만을 제거할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미국은 4월 민중항쟁에 깊숙이 개입했다. 미국이 민중항쟁에 편승하여 추진한 이승만제거공작의 내막은 다음과 같다.  

 

(1) <연합뉴스> 2010년 4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주한미국대사관은 1960년 4월 11일 이후 지방도시들에서 각계층 군중이 학생시위투쟁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는 중대한 정보를 미국 국무부에 보고했고, 4월 15일 미국 국무부는 한국의 불안한 정치상황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 결정에 따라, 미국 국무부는 3.15부정선거 책임자들을 사퇴시키고, 선거법과 지방자치법을 개정하고, 국가보안법 독소조항을 폐지하고, 참의원 선거를 실시하라고 요구한 각서를 이승만에게 빨리 전달하라고 주한미국대사관에게 지시했다는 것이다. 위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의 그런 긴급지시를 받은 주한미국대사 월터 매카너기는 1960년 4월 25일 오전 9시 10분 국방장관 김정렬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이승만을 빨리 만나 그가 선거를 다시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하라”는 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2)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 카터 맥루더는 1960년 4월 19일 오후 5시를 기해 황급히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대도시들에 계엄령을 선포하도록 조치했다. 형식적으로는 한국군 육군참모총장 송효찬이 계엄령을 선포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송효찬을 앞에 내세워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주한미국군사령관 맥루더는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한국군 육군 제15사단을 그날 밤 8시 서울 중량교 부근에 출동시켰다. 밤 10시 계엄군은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동대문과 종로를 거쳐 중앙청 청사 주변과 세종로에 포진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주한미국군사령관 맥루더가 계엄군에게 출동명령을 내리면서 실탄은 지급하지 말고 공포탄과 최루탄만 지급하도록 조치했고, 어떤 경우에도 실탄을 발포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4월 민중항쟁을 유혈적으로 진압하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그런 명령을 받은 계엄군은 경무대로 향하는 마지막 저지선만 지켰을 뿐,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들에서는 대규모 시위투쟁이 제지를 받지 않고 계속되었다.  

 

1960년 4월 26일 서울 세종로에 구름처럼 몰려든 시위군중은 그곳에 배치된 계엄군 전차 3대를 에워쌌다.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은 마치 장난감 전차에 올라타는 것처럼 전차에 올라타고 즐거워했고, 계엄군은 시위대원들이 올라탄 전차들을 몰고 시위군중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세종로를 빙빙 돌아다니는 진기한 광경을 펼쳐보였다. 또한 계엄군은 시위를 진압하지 않고, 시위군중이 경무대 방향으로 진격하려고 할 때만 공포탄과 최루탄을 쏘며 저지했다. 미국의 흉계는 민중항쟁에 편승하여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것이었으므로, 민중항쟁을 유혈적으로 진압하지 않았고, 이승만이 사퇴할 때까지 현상유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3) 4월 민중항쟁이 폭발적으로 격화되어 경무대진격투쟁이 계속되자 공포를 느낀 이승만은 한국군 최고지휘관 백선엽을 급히 경무대로 호출했다. 그러나 피어 드 실바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백선엽은 이승만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이승만이 4월 민중항쟁 중에 급히 자기를 찾았지만, 자신은 모른 척 외면했었다고 썼다. 백선엽이 이승만의 호출을 외면한 것은 피어 드 실바가 이승만과 한국 군부를 갈라놓는 이간공작에 성공하였음을 의미한다. 피어 드 실바가 이승만과 한국 군부를 갈라놓은 것은 4월 민중항쟁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대사건이었다. 만일 피어 드 실바가 이승만과 한국 군부를 갈라놓지 않았더라면, 이승만은 자기에게 충성하는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유혈진압을 명령했을 것이다. 만일 이승만에게 충성하는 한국군 일부 부대가 그의 명령에 따라 유혈진압에 나섰더라면, 4월 민중항쟁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처럼 참혹한 대량학살로 막을 내렸을 것이며, 이승만 친미파쇼정권은 붕괴위험을 넘기고 얼마동안 연명하였을 것이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기만적인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직후, 황급히 경무대로 들어간 주한미국대사 매카너기가 이승만과담화하는 장면이다. 맥카너기는 4월 민중항쟁이 서울에서 일어났던 1960년 4월 19일 밤, 그리고 4월 21일 오전에 각각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났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장면이 "폭동을 교사, 선동했다"고 떠들어대면서 미국의 요구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에서는 사퇴했으나 대통령직에서는 사퇴할 생각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런 추태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미국 국무부는 1960년 4월 26일 경무대에서 진행된 제3차 이승만-매카너기 담화를 통해 이승만에게 사퇴압박을 가했다.  

 

(4) 1960년 4월 26일 계엄군이 공포탄과 최루탄을 발사하며 저지하고 있었지만, 시위군중의 경무대진격투쟁은 파상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이승만은 오전 10시 라디오방송을 통해 발표한 대국민 담화에서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즉시 무조건 사퇴하겠다는 게 아니라, 조건부로 사퇴하겠다고 했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 사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건부 사퇴라는 기만적인 담화발표로 4월 민중항쟁의 투쟁열기를 식혀놓고, 집권을 연장해보려는 술책이었다. 

 

이승만의 기만적인 대국민 담화가 라디오방송에서 흘러나오고, 계엄군 전차들이 시위대원들을 태우고 세종로를 돌아다니는 진기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 때,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세종로에 나타났다. 주한미국대사 매카너기가 탄 승용차였다. 시위군중은 매카너기가 탄 승용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 차를 향해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이런 현상은 이승만제거공작에 4월 민중항쟁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 미국의 흉계를 시위군중이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음흉한 정체를 알지 못하고, 미국에게 맹목적인 호감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저들의 흉계에 넘어가는 지름길인데, 한국 민중은 60년 전이 지난 오늘에도 친미사상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계엄군은 매카너기가 탄 승용차가 시위군중 속에서 빠져나오도록 공포탄을 쏘며 길을 열어주었고, 그 승용차는 경무대로 직행했다. 맥카나기는 4월 민중항쟁이 서울에서 일어났던 1960년 4월 19일 밤,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났고, 4월 21일 오전에도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다시 만났었다. 그 두 차례의 담화에서 이승만은 장면이 “폭동을 교사, 선동”했다고 떠들어대면서 미국의 요구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부통령 장면이 전격사퇴했고, 국무위원 전원이 사퇴했는데도,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에서는 사퇴했으나 대통령직에서 사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이승만은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런 추태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미국 국무부는 1960년 4월 26일 경무대에서 진행된 제3차 이승만-매카너기 회담을 통해 이승만에게 사퇴압박을 가했다.  

 

경무대에서 이승만에게 사퇴압박을 가하고 대사관으로 돌아간 매카너기는 주한미국대사관 명의로 긴급성명을 발표했다. 매카너기는 긴급성명에서 “지금은 미봉책을 취할 시기가 아니”라고 하면서, 이승만에게 “국민의 불만에 대처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즉각 취해야 할 의무”를 상기시켰다. 미국의 사퇴압박에 더 이상 맞설 수 없게 된 이승만은 1960년 4월 27일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고, 당일 경무대를 떠나 자신의 사저인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4. 접동새 울음 속에 들려오는 피묻은 혼의 하소연

 

의문이 생긴다. 1948년에 이승만을 대통령에 앉혔던 미국은 왜 마음이 바뀌어 그를 혐오한 것일까? 이승만이 집권기간 중에 미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몇 차례 고집을 부리는 통에 미국이 골치를 앓기도 했지만, 그런 불화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로는 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은 왜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일까?  

 

1959년 8월 1일에 작성되었고, 2002년 10월 21일에 기밀해제된 미국 중앙정보국 1급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중앙정보국 서울지부는 이승만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매일같이” 수집하여 본부에 보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이승만은 1959년 5월 하순부터 집무능력이 떨어지고, 기초적인 개념조차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노쇠해졌다고 한다. 당시 이승만은 84세였는데, 의학용어로 설명하면, 그가 치매전조단계인 경도인지장애(mild cognitive impairment)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이승만이 경도인지장애에 걸렸다는 사실은 1959년 8월 15일 주한미국대사 월터 다울링이 이승만을 면담하고 나서 작성한 비밀전문에서도 드러났다. 다울링은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에서 심신이 너무 노쇠한 이승만은 결재서류도 거의 읽지 않고, 장관들도 만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승만의 처 프란체스카와 30대 초반인 대통령 비서 박찬일이 상의하여 정책을 결정하면, 당시 부통령 이기붕은 박찬일로부터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사실상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경도인지장애에 걸려 통치력을 상실한 것은 미국이 이승만을 사퇴시키려고 한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심층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 심층적인 이유를 추론할 수 있는 근거는 1960년 3월 25일 평양주재 소련대사 쁘자노브가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쁘자노브의 비밀전문에 따르면, 조선외무성 부상 김태희는 평양주재 사회주의나라 대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보했다고 한다.  

 

조선외무성 부상은 통보에서 주한미국군이 1959년 2월 26일 경기도 오산 공군기지에서 마타도어 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고 밝혔다. 그가 언급한 MGM-1 마타도어 미사일은 미국이 1952년부터 실전배치한 것인데, 사거리가 1,000km이고, 폭발위력이 50킬로톤급인 W5 전술핵탄두를 장착하는 지대지순항미사일이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를 초토화하고 14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핵폭발위력이 21킬로톤이었는데, 미국이 오산미공군기지에 배치한 지대지순항미사일의 핵폭발위력은 50킬로톤이었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은 1950년 리비아의 윌러스공군기지에 미국군이 배치한 MGM-1마타도어 지대지순항미사일의 모습이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딸리아가점령했던 리비아 북부지역을 리비아가 1953년에 독립하기 전까지 점령하고 있었다.미국은 1957년 말부터 1958년 초까지 마타도어 지대지순항미사일 대대, 어네스트존 로켓 대대, 280mm 핵포병 대대를 주한미국군기지들에 배치하였다. 이 무기들에는 각종 전술핵탄두들이 장착되었다. 그로써 한국은 미국의 북침핵전쟁기지로 전변되었다. 한국을 미국의 북침핵전쟁기지로 전변시킨 미국은 북침핵전쟁을 도발하기위해 한국군을 재편하고, 핵전쟁훈련을 감행하면서 광분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쇠한이승만은 경도인지장애에 걸려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승만은 북침핵전쟁도발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노쇠한 늙은이에 불과했다. 미국은 자기들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할 유능한 친미인사를 한국 대통령으로내세워야 할 필요를 느꼈다.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고 장면을 대통령으로 내세우려고 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쁘자노브의 비밀전문에 따르면, 1960년 3월 25일 조선외무성 부상이 평양주재 사회주의나라 대사들에게 통보한 내용은 미국이 한국에서 북침핵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충격적인 정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외무성 부상은 통보에서 “1957년 7월과 8월 남조선주둔 미군 제7사단이 핵무기로 무장한 제5사단으로 개편되었고, 일본에서 남조선으로 이동배치된 제1기계화사단도 1957년 말 핵무기로 무장한 사단으로 개편되었으며, 1957년 말부터 1958년 초까지 어네스트 존 로켓 대대, 마타도어 지대지순항미사일 대대, 280mm 핵포병 대대가 남조선에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가 언급한 MGR-1 어네스트 존 로켓은 미국이 1953년부터 실전배치한 것인데, 사거리는 25km이고, W31 전술핵탄두가 장착된다.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핵탄두를 장착한 이 로켓에는 타격대상에 따라 선택적으로 2킬로톤급 전술핵탄두, 10킬로톤급 전술핵탄두, 30킬로톤급 전술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언급한 M65 280mm 견인핵대포는 미국이 1955년부터 실전배치한 것인데, 사거리는 30km이고, 15킬로톤급 W9 전술핵포탄을 사격할 수 있다. 

 

미국의 북침핵전쟁 도발징후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조선외무성 부상의 통보에 따르면, 미국은 “1953년에 16개 사단이었던 남조선군을 1959년에는 31개 사단으로 증가시켰고, 화력도 증강시켰으며, 1959년에 북침전쟁연습은 64회나 진행되었으며, 남조선에서 탄약공장들과 총기수리공장들이 확장되었고, 초음속 전투기들이 배치될 공군기지들이 새로 건설되고 있고, 군항들이 재건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남조선군 1개 사단을 핵무장 사단으로 개편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으며, 남조선군 장교들은 1960년부터 1963년까지 4개년 계획에 따라 핵전쟁훈련을 받고 있으며, 1960년 5월에는 남조선군 25만명이 참가한 핵전쟁훈련이 진행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통보내용을 보면, 미국은 1965년에 북침핵전쟁을 도발할 계획을 세우고 핵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6.25전쟁이 정전된 때로부터 불과 6년밖에 지나지 않은 1959년 당시 조선은 미국의 전술핵공격을 막아낼 방어력을 갖지 못했다. 6.25전쟁 중에 핵폭탄을 탑재한 B-29 폭격기 편대를 조선 영공에 침입시켜 히로시마의 핵참화를 재연하려고 악랄하게 책동했던 미국이 1959년에는 각종 전술핵탄두를 장착한 순항미사일, 로켓, 핵포탄으로 히로시마의 핵참화를 재연해보려는 북침핵전쟁도발에 미쳐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노쇠한 이승만은 경도인지장애에 걸려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승만은 북침핵전쟁도발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노쇠한 늙은이에 불과했다. 1960년 당시 북침핵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었던 미국은 자기들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할 유능한 친미인사를 한국 대통령으로 내세워야 할 필요를 느꼈다.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고 장면을 대통령으로 내세우려고 했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민중은 4월의 거리와 광장에서 수많은 피를 흘렸건만, 이승만을 장면으로 교체하려는 미국의 음흉한 정치음모가 실행되는 비극이 일어났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체는 여전히 은폐되었다. 그리고 어언 60년 세월이 흘렀다. 

 

4월 민중항쟁 기념탑에 새겨진 글귀처럼, 지난 60년 동안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려오고 있다. 미국의 제국주의지배를 그대로 두고서는 8천만 민족이 미국의 핵전쟁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역사의 진리가 해마다 4월이 오면 피묻은 혼의 하소연으로 들리고 있다. 미국의 제국주의지배를 그대로 두고서는 5천만 민중이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역사의 진리가 해마다 4월이 오면 피묻은 혼의 하소연으로 들리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첫페이지  |   코레아뉴스  |   성명서  |   통일정세  |   세계뉴스  |   기고

Copyright ⓒ 2014-2020 [개벽예감 390] 접동새 울음 속에 들려오는 피묻은 혼의 하소연 > 정세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