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살292] 격추당한 EC-121,미국의 필패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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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4-26 20:5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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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살292] 격추당한 EC-121…미국의 필패 요인
북미 직접 대결, 미국이 패배한 날 ④
박 명 훈 기자 자주시보 4월 5일 서울
1969년, 북한 인민군에 의해 미국의 전자정찰기와 헬리콥터가 격추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푸에블로호 사건 뒤 1년도 지나지 않아 연거푸 벌어진 사건에 전 세계는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세계 최강이라 알려진 미국이 바다에 이어 하늘에서마저 북한에 당했기 때문이다.
미 국가안보국(NSA)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EC-121 등을 동원한 대북 공중 정찰을 강화했다. 푸에블로호 사건 뒤 북한의 무력 행동을 더욱 우려하게 된 미 정치권이 공군·해군을 동원해 북한을 예의주시하며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려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1968년 11월 이후부터 1969년 4월까지 대북 공중 정찰을 200여 차례나 했다.
1. EC-121 전자정찰기 격추 사건
주일미군기지에서 출발해 북한 영공 침범한 전자정찰기
먼저 1969년 4월 15일 벌어진 EC-121 격추 사건을 살펴보자. 북한은 미그-21로 EC-121을 격추했고 타고 있던 미국 승무원 31명은 모두 사망했다. 이는 냉전이 시작하고 당시까지의 군사 충돌 사건 중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것이다.
1969년 4월 15일, 도쿄 근처 주일미군 아쓰기 해군기지에서 미 해군 7함대 제1정찰대 소속 정찰기 EC-121 워닝스타가 날아올랐다. EC-121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북상해 소련 태평양함대를 살핀 뒤 북한 연안을 정탐하는 임무를 받았다. (「바다에서 당한 지 1년 만에 하늘에서 큰코다친 미국」, 신동아, 2010.10.5.)
특히 북한의 북동쪽은 중국, 소련과 국경을 맞대 미 군부와 정보기관이 관심을 가진 지역이었다. 미 합동참모본부와 국방정보국이 이 지역의 공중 정탐 임무를 승인했다. 미국은 이를 평시 공중 정찰 프로그램으로 명명했다. (「WHY DID NORTH KOREA SHOOT DOWN A U.S. RECON PLANE IN 1969?」, HISTORYNET, 2022.3.23.)
그런데 대북 공중 정찰을 두고 평시 공중 정찰이라는 미국의 주장은 무리가 있다. 정탐 자체가 상대국을 적대하는 전쟁 유발 행위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 뒤 1968년 11월 이후 EC-121로만 8차례 북한을 정탐했다.
더구나 4월 15일은 최고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의 탄생일이었다.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의 탄생일은 국가 명절이며 4월 초반부터 많은 행사가 진행된다. 북한으로선 이 시기 EC-121의 정탐 행위를 의도적 도발로 받아들였을 법하다.
앞서 3월 김일성 주석은 북한 영공에 침범하는 EC-121을 격추하라고 명령했다. 또 군부대에 전쟁 준비 태세를 갖추게 하고, 모든 주민에게 전시 동원 태세로 전환할 것을 지도했다고 한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영공 침범에 대비한 작전을 수립할 것과 “간첩 비행기가 다시금 공화국 영공에 날아들면 즉시 우리 비행기를 출동시켜 쏴 떨굴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 결과 4월 15일 EC-121이 격추됐다. 격추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이 영공을 침범했다는 북한과 공해상을 날고 있었다는 미국의 주장이 엇갈리는데, 기밀 해제된 미국의 문건에 따르면 미국이 북한 영공에서 위협 행위를 했다는 견해에 힘이 실린다.
이 때문인지 미국으로서도 인민군에 격추될 위험에 나름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9년 4월 11일, 주한미군사령관 찰스 본스틸은 미 태평양사령부 총사령관 존 매케인에게 “승무원들은 특히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북한의 반응이 처음 나타날 경우 (작전을) 중단할 준비”를 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의 수는 미국보다 한 발 더 앞서 있었다. 인민군은 4월 15일 오전 10시 35분께 EC-121의 영공 침범을 탐지했다.
이에 앞서 북한은 EC-121에 대응할 수 있는 최신예 전투기 미그-21 2대를 미군 정찰기가 자주 출몰하는 동해 근처에 미리 옮겨뒀다. 깊숙한 내륙 북창비행장에 있던 미그-21 2대를 분해해 열차로 옮긴 뒤, 재조립해 동해안에 있는 어랑비행장에서 출격시켰다.
미군은 인민군 전투기를 피할 수 있으리라 여기며 방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민군 대위인 현기수 조종사는 전투기 기체의 무게를 최소한으로 했고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초저공 비행으로 레이더망에서 벗어났다. 현기수 대위가 AA-8 공대공 미사일을 발사해 EC-121을 격추한 시각은 오후 3시 35분이었다. 미군은 인민군 전투기의 공격 가능성을 대비했지만 손 쓸 틈도 없이 당했다. (신동아, 위의 기사.)
NSA 보고서는 EC-121 정찰을 두고 북한을 경계하기 위한 “기초적인 노력”이었다고 짚었다. 그런데 EC-121에는 “북한의 향후 의도와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빼낸다는 이유로 기존 인원보다 2배나 많은 암호 기술자와 언어학자가 타고 있었다고 했다. 이는 기초적인 노력이라고 보기에는 과하다.
그런데도 미국이 푸에블로호 사건에 이어 북한에 또다시, 그것도 이번에는 공중에서 정찰기가 격추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미국이 북한에 또다시 패배하며 망신살을 뻗친 것이다.
2. 북한과 미국의 차이
1) 단호하게 대응한 북한
기밀 해제된 소련 외교문서에서는 미국에 단호하게 대응한 북한의 모습이 확인된다.
EC-121 격추 다음 날인 4월 16일, 허담 북한 외무성 부상과 니콜라이 수다리코프 북한 주재 소련대사가 만났다. 소련은 북미 간 전쟁 발발을 우려하며 북한에 자제해 달라고 했다.
이에 허담 부상은 수다리코프 대사에게 “보복은 보복으로, 총력전은 총력전으로 대응하겠다”, “그들(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못 얻었다”, “우리 정부는 우리의 주권을 감히 침해하는 자는 강력하게 멈춰 세울 것이라고 여러 번 경고했다. 이건 공언이 아니다” 등의 말을 했다. (「북한의 EC-121격추사건과 선제타격론」, KBS, 2017.4.24.)
노동신문 등 북한 언론도 EC-121 정찰기의 영공 침범에 관해 자주권에 엄중히 도전하는 것이며 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에 새로운 위협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북한은 미국에 단호하게 대응했다.
2) 의견 엇갈리며 우왕좌왕한 미국
반면 미국은 EC-121 격추 대응을 두고 내부에서 혼란을 벌이다가 결국 전면전을 포기했다.
처음에 미 백악관과 군부는 고강도 대북 타격론을 꺼냈다. 특히 국가안보보좌관인 헨리 키신저는 북한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지 못하게 굴복시켜야 한다고 했다.
키신저는 ▲북한 해안 봉쇄 ▲북한 선박 나포 ▲전술핵 투하 등을 제시했다. 합참의장 얼 휠러는 히로시마에서 쓴 원자폭탄보다 2.5배 위력이 큰 핵탄두를 북한에 떨어트리는 계획을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후 미국은 핵추진항공모함인 USS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항모 4척을 비롯해 USS 뉴저지, 순양함 3척과 구축함 15척, 호위함 1척 등 40여 척으로 구성된 71기동전대를 원산항 앞바다에 급파했다.
하지만 닉슨은 EC-121을 격추한 북한을 향해 “다음에는 결코 그렇게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말뿐인 경고에 그쳤다. 결국 전면전을 포기한 것인데, 미국 내부에서도 이에 관한 쓴소리가 나왔다.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닉슨의 대응을 두고 “유약하고, 우유부단하며, 조직적이지 못했다”라고 꼬집었다. (「[논&설] 키신저의 ‘현실정치’와 한반도…세력균형 속 힘의 과시」, 연합뉴스, 2023.12.4.)
게다가 미 정치권과 군부는 EC-121이 격추당한 초기 북한 영공을 침범했는지 안 했는지를 둘러싸고 이견을 보였다. 푸에블로호 사건에서 영해 침범을 인정하며 북한에 사과했던 미국으로선 똑같은 ‘악몽’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김차준, 「EC-121기 사건과 미국의 한반도 위기에 대한 대응」, 『통일정책연구』 제31권, 통일정책연구원, 2022.)
북한의 대응에 맞설 치밀한 전략을 고려해야 할 상황에서 엉뚱한 논의를 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셈이다.
당시 미국이 북베트남과 베트남전쟁을 중단하려 협상 중이던 상황에서, 북한과 전면전을 하기에는 부담이 커서 물러섰다는 시각도 있다.
이러한 평가는 수세에 빠진 미국의 처지를 짚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런데 미국이 왜 북한과 전면전을 포기했는지를 두고 여전히 의문이 제기된다. 이런저런 ‘설’이 있지만 미국이 물러선 이유에 관해 명확한 답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EC-121을 동원해 여러 차례 북한을 정탐한 점을 주목한다.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북한 곳곳을 정탐한 뒤 전면전을 포기한 전력이 있다. 이런 점에서 바라보면 미국은 정탐 과정에서 자기에게 불리한 뭔가를 발견해 전면전을 그만뒀을 가능성이 있다.
3) 종합 평가
여기까지 보면 북한이 EC-121 격추와 관련해 처음부터 승기를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은 북한에 꼭 유리하지 않았다. 스탈린 사후 미국과 타협하는 노선을 택한 사회주의권의 큰형님 격인 소련이 미국을 자극하지 말라며 북한을 편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1972년 3월에 출판된 책 『각국개황』에는 EC-121 격추 당일 “소련 수정주의 정부는 미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급히 군함을 파견해 미제국주의를 도와 비행기 잔해를 건졌다. 4월 18일, 닉슨은 기자회견에서 소련 수정주의에 대해 ‘아주 고맙게 여긴다’라고 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정문일침294] 미 EC-121정찰기격추사건 다시 벌어지면 이제 시체 건져줄 나라 없을 것」, 자주시보, 2017.7.18.)
실제로 소련은 EC-121 수색 및 구조 작전에 함께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소련 해군이 협력한 첫 사례였다.
EC-121 격추 사건과 관련해 사회주의 대국인 소련과 중국은 북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고, 북한도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즉, 북한은 자신의 힘으로 당시 최강대국인 미국을 이긴 셈이다.
공산권이 EC-121 격추의 진상을 밝히자고 요구해 4월 18일 열린 290차 군사정전위원회에서도 북한이 주도권을 쥐었다. 닉슨 정부는 푸에블로호 사건 때처럼 회담이 북한에 유리한 판이 될까 봐 정전위 개최 자체를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김차준, 위의 논문.)
정전위에서 마주한 북미 양측은 서로를 향해 먼저 도발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격추에 관해 미국이 영공을 침범해 자위권을 행사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영공 밖에서 정찰했는데 북한이 부당하게 공격했다고 했다. 그런데 미국은 결정적으로 북한의 중요한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북한의 리춘선 소장은 미국의 제임스 내프 소장을 향해 “우선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이 말한 대형 정찰기 EC-121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영공을 침범한 정찰기의 소속을 왜 말하지 못하는가?”라고 물었다.
이는 전날 ‘EC-121의 소속을 물으라’고 한 김일성 주석의 지도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EC-121은 미 해군 태평양함대 소속인데, 정전협정은 유엔군사령부(미8군사령부)가 체결했으므로 미국이 EC-121 격추 문제를 정전위에서 다루면 월권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의 EC-121 격추사건 조용히 덮은 이유」, 자주시보, 2017.7.13.)
리춘선 소장의 물음에 내프 소장은 “추가로 할 말은 없다. 휴회를 제안하는가?”라며 동문서답을 했다. 이후 미국은 북한 측의 물음에 끝내 답하지 않고 도망치듯 회담장을 떠나며 회담을 파투 냈다. EC-121을 격추당한 미국이 오히려 줄행랑치는 모양새를 보인 것이다.
이처럼 EC-121 격추 사건은 미국이 꽁무니를 빼면서 마무리됐다.
북한의 라디오 방송은 “우리 영공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미제의 무례한 비행기를 우리 인민군이 즉각 격추했습니다.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이룬 빛나는 승리입니다”라고 주민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미국이 잊은 냉전의 희생자. EC-121M 사건」, 유튜브 채널 ‘다큐 9분’, 2018.9.25.)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미국의 태도는 이상해 보인다. 미국의 관점에서 EC-121 격추는 자국민 31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월권행위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오히려 푸에블로호 사건 때보다 훨씬 강하게 북한을 몰아세워야 했을 법하다.
결과를 보면 EC-121 격추 사건은 푸에블로호 사건의 흐름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 다른 점이 있었는데, EC-121은 생존자 자체가 없었고 상대적으로 미국의 부담이 적었다는 점이다. 승무원과 함께 함정이 통째로 나포된 푸에블로호 사건의 쟁점은 생존자 송환이었다. 미국은 EC-121의 생존자가 없기에 북한에 끌려다닐 상황을 피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김차준, 위의 논문.)
미 언론은 EC-121이 북한 영공 정찰을 맡았다는 점에서 “날아다니는 푸에블로호”라고 불렀다. 이에 비춰보면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의 굴욕을 피해야 한다는 ‘의지’로 북한을 피해 다녔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시각에서 봐도 미국이 북한에 꼬리를 만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이 EC-121 격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가리자면 북한과 마주했어야 한다. 하지만 격추를 당하고 북한과 대면을 꺼린 시점에서부터 미국의 패배가 굳어졌다고 볼 수 있다.
3. OH-23G 헬리콥터 격추 사건
EC-121 격추 뒤 4개월이 지난 1969년 8월 17일, 인민군은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북한 황해북도 금천군 영공에 침범한 OH-23G 헬리콥터를 격추했다. 헬기에 타고 있던 미군 3명은 모두 살아남았는데, 이들은 12월 3일에 풀려날 때까지 북한에 붙잡혀 있었다.
이번에는 미국이 8월 18일, 북한에 사건 해결을 위한 정전위 소집을 요구했다.
미국은 북한과의 회담에서 영공 침범은 훈련 중에 생긴 우연한 사고라며 병사들과 헬기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북한은 헬기가 군사분계선을 한참 넘어 금천군까지 깊숙이 들어왔다면서 영공 침범은 의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사과를 요구하며 영공 침범을 인정할 것을 강조했다.
이에 미국은 유감 표명이라면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북한은 그동안 미국이 DMZ에서 벌인 정전협정 위반 사례를 세세하게 짚었다. 미국의 영공 침범이 분명한 상황에서, 협상은 점점 미국에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결국 국무부장관 윌리엄 로저스는 대통령 닉슨에게 북한이 원하는 대로 하자고 제안했고, 받아들여졌다. 푸에블로호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북한에 백기를 든 것이다.
12월 3일 발표된 미국의 사과 성명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공에 대한 심대한 침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권침해 ▲범죄적 행위를 인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군 병사 3명이 풀려난 뒤 북한은 “죄행에 대하여 사죄하고 앞으로 다시는 그와 같은 행동을 감행하지 않겠다고 담보했다”라고 발표했다. (강혜석 등, 『북한연구시리즈 65 신진연구자가 본 김정은 체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2023, 63~78쪽.)
그런데 이는 EC-121 격추와 비슷한 사건이 또다시 벌어지면 대북 핵공격을 불사하겠다고 한 미국이 말을 뒤집은 것이다. EC-121 격추 이후 닉슨 정부는 ‘강력한 한방’으로 북한의 추가 도발 의지를 뿌리 뽑겠다고 강조했다. (김차준, 위의 논문.)
앞서 닉슨 정부는 북한과 전면전을 피하고자 EC-121 격추에 대응하는 보복 공격을 보류했다. 그러면서 1969년 6월 25일, 미국이 EC-121 격추와 비슷한 공격을 또다시 받게 되면 북한에 전술핵을 쓸 수 있다는 내용의 비상계획을 검토했다. (「美 69년 北에 ‘전술핵 사용’ 비상계획 검토」, 연합뉴스, 2010.6.24.)
하지만 정작 헬기가 격추당했을 때 미군은 전술핵 투하는 물론 어떠한 군사 작전도 실행하지 않았다. 정부 차원에서 진지하게 검토해 온 비상계획을 실행조차 하지 않고 물러선 것이다.
1969년에 일어난 2가지 격추 사건에서는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북한에 쩔쩔매는 미국의 처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과정을 비춰보면, 북한의 실력이 미국을 압도해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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