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파괴해 온 세계의 민주주의] ①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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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12-31 18:2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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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파괴해 온 세계의 민주주의] ① 아시아
이 인 선 기자 자주시보 12월 26일 서울
미국은 그간 ‘민주주의 증진’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 내정에 개입해 왔다.
미국 국무부 지원 아래 국립민주주의기금(NED) 등은 공개적으로 각국 ‘민주주의 증진’ 단체들에 자금을 지원해 왔다. 그리고 중앙정보국(CIA)은 대사관 등을 통해 움직이며 공작을 벌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주의 증진’이라고 쓰지만 사실상 미국과 지원 대상 단체들은 체제를 전복해 친미 정권을 세우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도입해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미국은 ‘미국식 민주주의’가 최상의 제도인 것처럼 내세우지만 현재 미국 사회의 모습을 보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특히 최근 미국 대선들에는 정치 후진국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게다가 어느 나라나 그 나라에 조건에 맞는 형태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 나라 국민이 선택하고 만들어야지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하는 건 그 자체로 민주적이지 않다. 그런데 미국은 다른 나라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강요하고 이에 맞서는 국가는 미국의 걸림돌, 제재 대상으로 간주했다.
NED는 오랫동안 이러한 민주주의를 증진한다는 구실로 다른 나라의 국가 권력을 전복하고 내정에 간섭해 왔다. 또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고 여론을 오도하며 이념적 침투에 관여해 왔다.
전직 CIA 장교였던 필립 애지는 “요즘은 CIA가 직접 뒤에서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돈을 넣고 지시를 내리는 등 비밀리에 공작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의 조력자가 생겼다. 그곳이 바로 국립민주주의기금, NED”라고 말하기도 했다.
NED는 중남미, 중동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100개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먼저 아시아에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본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쿠데타, 반정부 시위 등을 기회로 만들어 왔다.
미국은 해당 국가 주재 대사관 등을 통해 미국의 지원을 바라는 세력을 포섭해 쿠데타, 반정부 시위 등을 일으켜 왔다. 그리고 마치 국민적 여론인 것처럼 조작해내 ‘민주화 시위’처럼 만들기도 했다.
미국은 이를 통해 그 나라의 국민을 분열시키고 친미세력에 대항하는 국민을 ‘반민주세력’, ‘독재세력’ 등으로 묘사해 국제적 공분을 사게 하는 방식도 활용했다.
그렇게 친미세력이 정권을 잡아 국민의 뜻이 아니라 미국의 의도대로 국가가 운영되도록 만들어 온 것이다.
미얀마
미얀마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1948년 1월 5개 지역을 아우르는 연방을 수립했다. 이들은 의원내각제 형태의 서구식 민주주의를 정치체제로 채택했다.
그러나 4개 지역의 소수민족 자치권은 중앙정부에 의해 박탈되었다. 그리고 소수민족이 자치주의 실현을 요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정권 수립을 주장하는 등 정쟁이 이어졌다.
다수 버마족과 소수민족 간 민족 분쟁과 끊이지 않는 정당들의 경쟁, 부정부패, 물가 폭등 등으로 국가는 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런 와중에 중국 국공내전 이후 국민당 군대 일부가 미얀마로 도망쳐 왔다. 미국은 이들을 지원하면서 이들이 남서쪽에서 중국을 괴롭혀 한국전쟁에 필요한 중국의 자원을 분산시키는 것을 계획했다.
미국은 미얀마의 혼란을 틈타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얀마 정부의 항의와 국제 사회의 압력이 커지면서 미국의 계획대로 되지 못했다. 1953년부터 국민당 군대가 철수했고 1960년 중국과 미얀마의 군사적 대응으로 남아있던 국민당 군대마저 미얀마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미국은 미얀마가 인도와 중국 국경에 있다는 점에서 관계를 유지하며 미얀마에 대사관을 둔 중국과 소련의 정보를 얻고 영향력 확대 기회를 도모했다.
미국이 미얀마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 계기는 1988년 8888 시위였다.
대학생들은 1987년 미얀마 정부의 화폐 개혁을 계기로 미얀마 수도 양곤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키며 도로에서 신호등 등을 파괴하는 행동을 벌였다. 정부가 물러서며 한 차례 해소가 되었지만 이들은 양곤과 만달레이에서 반체제 유인물을 만들었고 11월에는 폭탄 테러도 자행했다.
폭력적인 시위가 계속되던 중 1988년 3월 12일, 양곤 공과대학교 학생들이 청소년들과 충돌하다 경찰서에서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 학생이 총에 맞아 숨졌고 이를 계기로 반정부 시위에 각계각층이 모이며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1988년 8월 8일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일당 군사 독재 타도’, ‘1974년 헌법 폐지’ 등을 외치며 시위를 진행했고 이를 ‘8888 시위’라고 부른다.
당시 시위대는 국제적 관심과 미국의 개입을 바라며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진행했다. 관련해 미국만이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봤다는 분석도 있다.
이때 등장했던 인물 중 한 명이 아웅산 수치다. 미얀마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미얀마 국부 아웅산의 딸이었던 아웅산 수치는 영국에서 살다가 이즈음 귀국해 1988년 9월 27일 국민민주연맹을 창당하고 의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내툰나잉 국민민주연맹 한국지부 대표는 2013년 SBS와의 인터뷰에서 “사실 아웅산 수치 여사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 본 적도 없었고, 연설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아웅산 장군님의 딸 정도로만 알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저 아웅산의 딸이었던 점에서 추켜세워졌다는 것인데 여기에 시위대가 바랐던 미국의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스티븐 솔라즈 미국 하원 의원 겸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 위원장이 1988년 9월 3일 미국 정부의 대미얀마 정책을 반영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미얀마에 도착했다.
솔라즈 위원장은 이날 기자들에게 “미얀마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라며 “유일한 문제는 새로운 시대가 미얀마 국민의 의지와 소망에 따라 평화롭게 도래할 것인지 아니면 혼란과 무정부 상태, 폭력의 산물이 될 것인지 여부다”라고 평가했다.
그러고 나서 미얀마 정부 인사들을 비롯해 아웅산 수치 등 야당 인사들을 만났다. 이 과정에서 영국에서 유학했던 아웅산 수치를 자신들의 기회로 본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이를 계기로 미얀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미얀마 정부가 미국이 정한 길을 가도록 내정 간섭을 일삼았다.
미국은 미얀마 국부의 딸이라는 점을 내세워 아웅산 수치를 지원했다. 특히 군부가 아웅산 수치를 내란 음모죄로 1989년 이후 가택 연금 조치를 취했을 때 미국은 아웅산 수치를 ‘정권의 탄압을 받은 민주화 투사’라고 홍보하며 인권 탄압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소리(VOA) 방송과 자유아시아방송(RFA)이라는 미국 정부의 두 선전 매체는 1989년부터 아웅산 수치를 석방시키기 위한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친 선전의 선두에 섰다.
당시 아웅산 수치는 서방 정치인, 뉴스 매체, 그리고 자칭 인권 비정부기구가 가장 사랑하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리고 국제앰네스티에 의해 ‘양심수’로 지명되었으며, 타임지는 아웅산 수치가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받은 점을 두고 “간디의 자녀”이자 정신적 후계자로 명명하였다. 그렇게 아웅산 수치는 노벨평화상도 받게 되었다.
2012년 9월 17일 미국을 방문한 아웅산 수치는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부장관을 비롯한 행정부와 정치인들로부터 융숭한 환대를 받은 것은 물론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도 공식 접견을 가질 만큼 국빈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도 아웅산 수치를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처럼 여겨 왔다.
하지만 아웅산 수치가 외무부장관과 국가고문을 역임했을 당시 군부가 미얀마 서부 연안지역인 라카인주에 주로 사는 방글라데시 계열의 로힝야족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축출하는 일이 있었다.
로힝야족은 오랜 세월 미얀마에서 살아왔지만 미얀마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과 박해는 지난 40여 년간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 난민 축출을 옹호했다. 또 로힝야 학살 사건을 취재하다 체포됐던 2명의 로이터 통신 소속 기자들의 석방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것은 군부가 아닌 수치였다는 증언들도 공개됐다.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가 받고 있는 로힝야 집단 학살의 혐의를 반박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파견될 법률단을 직접 이끌 계획임을 밝히기도 했다.
즉 미국이 주도해 미얀마 민주화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 아웅산 수치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에 노벨평화상을 박탈해야 한다는 국제적 비난이 일었고, 2004년 5.18기념재단이 수여한 광주인권상이 2018년 철회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밝혔듯이 “비판 여론에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웅산 수치를 지지했던 미국은 비난을 피한 채 여전히 미얀마 민주주의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미국은 아웅산 수치 외에도 다양한 8888 시위 참여자들을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었는데 그중 한 명이 미얀마 나우 설립자인 스웨 윈도다.
미얀마 나우는 런던에 기반을 둔 자선 기구인 톰슨 로이터 재단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 재단은 NED에 의해 인수된 재단이다.
2016~2020년 미얀마 단체에 할당된 NED 보조금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해마다 수십만 달러를 들여 “미얀마어 및 영어 누리집과 사회관계망”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을 높임으로써 투명성과 책임감을 증진해왔다”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미국은 미얀마 여론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 국제 사회에 홍보해왔다.
이외에도 미국은 미얀마와 관련해 국제공화연구소(IRI) 등 다양한 미국 내 비정부기구들을 활용해 ‘미얀마 민주주의 상황’을 선전하고 있다.
더구나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며 미얀마에서 반정부 무장 조직을 양성해왔다.
중국과 협력을 통해 추진된 미얀마 북부의 밋손 댐 공사는 2017년부터 무기한 중단되었다. 건설은 2009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지역적으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은 미얀마 내 대표적인 반정부 성향의 소수민족 무장단체인 카친독립군이 활동하는 곳이다. 그리고 카친독립군은 미국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무장 조직이다.
위키리크스에 의해 공개된 2010년 미얀마 주재 미국 대사관 전보는 이와 관련해 “카친에서 시민사회단체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미국 임시 대리 대사였던 래리 딩거에 따르면, 대사관 관계자는 이 댐에 항의하는 많은 사람이 “대사관의 소액 보조금 수령자”라고 언급하며 미국이 이 문제에 개입하고 있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실제로 미얀마 주재 미국 대사관은 이 댐이 “미얀마를 괴롭히는 급성 전력난”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 반대하던 카친지역 단체들에 돈을 지급해왔다.
이런 미국의 작업을 통해 미얀마에선 민주주의가 파괴되어 현재 정치세력 간 갈등, 민족 간 갈등이 높아졌고 군부 집권에 따른 미국의 제재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국 비정부기구 ‘미얀마 캠페인 UK’의 2006년 보고서는 미얀마 ‘민주화’와 관련해 NED의 중심 역할을 강조했다.
그 보고서는 “약 30개의 미얀마 민주화 단체에 대한 하위 보조금을 통해” NED가 지원하고 있다며 “NED의 지원은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원칙적으로’ 미얀마 내에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입증된 능력을 지닌 조직뿐만 아니라 상황의 전개에 따라 성장과 적응 능력이 있는 조직을 대상으로 할 것”이라고 밝혔다.
NED는 2023년 80개 사업을 벌이고 약 678만 달러(약 98억 원)를 투입했다.
미국 국무부는 “미얀마는 민주주의로의 전환기에 있는 국가로 남아있으며, 상당한 지속적인 도전과 인권 문제에 직면해 있다”라며 여전히 미얀마에 자신들이 필요함을 피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는 1950년대 다양한 지역, 문화, 언어, 종교, 이념, 정당 간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민족주의자였던 수카르노는 반공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중국과 소련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당이 되었고 당원 수가 300만 명이 넘기도 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공산당과 연대하고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했다. 인도네시아 주재 미국 대사(1958.2.~1965.5.)였던 하워드 존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미국 정부가 인도네시아에서 공산주의세력의 팽창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고 밝혔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57년 9월 25일 CIA에 수카르노 정부를 전복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CIA는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고 주로 필리핀에 작전기지를 세웠다. 그런 다음 수마트라와 술라웨시에 있는 인도네시아 군부와 접촉했다. CIA는 미국 국방부와 협력하여 수마트라와 술라웨시 반군 군대에 배포할 무기들을 준비했다. 또 심리전을 위해 반수카르노 방송을 하는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반군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렇게 1958년 CIA의 지원을 받은 인도네시아 군부의 일부가 수카르노 대통령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 쿠데타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CIA는 포기하지 않고 인도네시아에서 계속 공작을 이어갔다.
미국 영화를 인도네시아에 들여오는 회사인 미국영화협회(AMPAI)의 월리엄 파머 대표, 하워드 존스 미국 대사 등이 당시 활동한 CIA 요원이었다.
그 결과 1965년 9월 30일 수하르토 장군의 군사 쿠데타로 수카르노 정권이 전복되었다. 수하르토 군부는 새로운 정권에 반대하는 비폭력 공산주의 지지자, 인도네시아 여성운동 및 노동조합 활동가, 지식인, 교사, 토지 개혁 옹호자, 중국계 주민을 모두 표적으로 삼았다. 생존자들은 약 2년 동안 이들 중 25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샬 그린 인도네시아 주재 미국 대사(1965.6.~1969.3.)는 쿠데타 이후 3주가 지난 시점에 “(수하르토 군부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파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으며, 나는 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육군의 결단력과 조직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다”라고 밝혔다.
앤드류 길크리스트 인도네시아 주재 영국 대사는 1965년 10월 5일 영국 외무부에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약간의 총격이 효과적인 변화를 위한 필수적인 예비 조치가 될 것이라는 내 믿음을 결코 숨긴 적이 없다”라고 썼다.
인도네시아 주재 미국 대사관의 1963~1966년 기밀 해제 문서를 통해 미국 정부는 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었고 환영했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이익을 위해 학살을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촉진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도네시아 주재 미국 대사관은 1965년 10월 중순 대사관을 찾은 부중 나수티온 인도네시아 법무부장관 특별보좌관에게 “미국 정부는 상황의 민감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언론의 자극적 추측 보도가 나오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CIA는 수카르노를 암살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처럼 미국은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독재자인 수하르토 정권을 지지했고 재정 지원, 군사 지원을 제공했다.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진 후 1999년부터 선거에 따라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미국은 앞선 사실을 숨긴 채 인도네시아와 관계를 유지해왔다.
좋은 관계라기보다는 미국의 압박에 인도네시아가 굴복한 부분도 있었다.
미국과 인도네시아가 군사적 협력을 맺은 배경에는 미국의 제재 부과 압박이 있었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정부가 2020년 러시아산 수호이 Su-35 전투기와 중국산 해군 함정 구매 등을 논의한다고 발표하자 트럼프 정부는 논의를 중단하지 않으면 제재할 것이라고 겁박했다.
이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굴복했고 2022년 2월 미국은 인도네시아에 F-15EX 전투기 36대 구매를 승인해줬다. 그리고 2023년 8월 인도네시아는 F-15EX 전투기 24대 구매를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미국의 이러한 행태는 엄연한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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