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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파괴해 온 세계의 민주주의] ③ 중남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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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12-31 18:41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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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파괴해 온 세계의 민주주의] ③ 중남미-1


박 명 훈 기자  자주시보 12월 30일 서울

▲ 중남미 지도. 

 

미국은 명색이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내세우며 1776년에 건국한 나라다. 하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 침탈 정책으로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정부를 무너뜨려 왔다. 이러한 미국의 ‘민주주의 깨부수기’는 특히 미국과 가까운 중남미에서 두드러졌다.

 

1823년 제임스 먼로 정부 시기 미국은 이른바 먼로 독트린을 선언했다. 유럽 열강 등 ‘외부세력’을 향해 자신의 ‘안마당’인 중남미 문제에 끼어들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후 미국은 중남미 곳곳에서 정부 전복, 군부 쿠데타 지원 등 악질적인 국가 차원의 범죄를 무수히 일삼아왔다. 

 

이와 관련해 손혜현 외교부 외교안보연구소 미주연구부 연구교수가 2019년 12월 31일 발표한 보고서 「미국과 중국의 대중남미 정책의 변화」를 살펴보자.

 

손 교수는 “미국의 대중남미 정책은 전통적으로 역외 경쟁 세력이 중남미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고 미국의 패권에 저항하는 역내 불만세력의 등장을 차단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하였다”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유럽에서 중남미를 분리시킨 1823년 ‘먼로주의’ 선언과 중남미에 대한 간섭을 정당화한 1904년 ‘루스벨트 추론’ 이래 곤봉 외교, 달러 외교, 반공 정책 등으로 대표되는 일방적인 개입주의 정책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미국의 안보, 경제, 정치·외교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독재자와의 협력도 주저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송기도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2008년에 펴낸 책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에서 “미국은 사사건건 중남미 국가들의 내정을 간섭했으며, 미국의 뜻에 어긋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복을 가했다”, “중남미에서 일어나는 쿠데타·혁명·정변 등 모든 중요한 사건들에는 항시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개입”했다고 짚었다.

 

미국 하버드대 연구진에 따르면 미국은 1898년부터 1994년까지 96년 동안 중남미 각국에서 정부 전복을 시도했다. 이 가운데 미국은 41차례 정부 전복을 ‘성공’시켰으며 이 가운데 직접 개입은 17건, 간접 개입은 24건으로 나타났다. ([MT리포트]100년간 41번 개입...美는 왜 중남미 흔드나, 머니투데이, 2019.10.28.)

 

1994년까지 알려진 게 이 정도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으니 미국이 중남미에서 벌인 민주주의 파괴 공작은 더욱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200년이 넘도록 중남미에 깊숙이 개입했고 그 후과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번 글은 두 편으로 나눠 미국이 중남미 각국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한 사례를 집중해 살펴본다.

 

① 아이티 (1849년~현재)

 

아이티는 1804년 프랑스에서 독립했다. 흑인 노예 출신이 대다수인 아이티 민중들은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대통령도 직접 선출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아이티가 건국된 뒤 50여 년 동안 아이티가 ‘흑인이 세운 나라’라며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1849년~1914년 사이 아이티를 25차례나 침략했다.

 

1915년 들어 미국은 아예 아이티를 점령해 보호령으로 삼았다. 그리고 1934년까지 아이티를 식민 지배했다. 지배 기간 동안 미국은 아이티의 노예 제도를 부활시켰고 의회를 강제 해산했다. 또 반미 성향의 후보가 당선되지 않도록 선거를 통제했다.

 

아이티가 독립한 뒤에도 미국의 개입은 끊이질 않았다. 미국은 1957~1986년 프랑수아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 정권을 지원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1991년에 아이티 내 군부 쿠데타를 도와 아이티 민중이 선출한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축출했다. 1994년에는 아이티의 정국 안정을 위한다는 구실로 미군을 보내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다시 복귀시키기도 했다. 대신 아리스티드 대통령에게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하라는 ‘복귀 조건’을 강요했다.

 

그러나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미국을 향해 배상금을 요구하는 등 미국의 잘못을 제기했다. 이에 미국은 2004년 2월 26일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한밤중에 납치해 강제로 다른 나라에 망명을 보내는 방식으로 내쫓았다. 이어 말 잘 듣는 꼭두각시 정부를 세워 아이티를 통제 아래에 두려 했다. 이처럼 미국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아이티의 민주주의를 짓밟는 횡포를 벌여 왔다.

 

2024년 기준 아이티는 전역에서 폭력과 혼란이 난무하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다. 현재 아이티에는 미국의 입김이 강한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 평화유지군은 성범죄를 저지르는 등 오히려 아이티의 불안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② 쿠바 (1898년~현재)

 

▲ 쿠바 국기를 흔드는 소녀.  © Nicolas Maduro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를 점령했다. 미국은 1902년까지 쿠바에 미군정을 두고 강압 정책을 실시했다. 또 미군이 철수한 뒤에도 친미 우파 하수인들이 권력을 계속 장악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하수인들을 통해 미국은 쿠바 내 대다수 생산시설도 소유했다. 쿠바는 독립한 뒤에도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식민지였다.

 

이런 쿠바의 상황을 뒤집은 것이 피델 카스트로가 주도한 쿠바 혁명이다. 카스트로 등 공산주의세력은 미국이 지원하는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부에 대항해 민중들과 함께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1958년 12월 30일 바티스타 정부를 무너뜨렸다.

 

쿠바에는 1959년 1월 1일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 정부가 들어섰다. 쿠바 민중은 첫 조치로 미국계 기업과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한 혁명 정부의 정책을 반겼다. 그러나 미국은 가까운 쿠바에 자신과 맞서는 혁명 정부가 등장한 걸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미국은 1960년 들어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거주하는 쿠바 망명자 1,500여 명을 모아 이른바 2506여단을 만들었다. 이어 1961년 4월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피그만에 여단을 상륙시키며 쿠바를 침공했다. 피그만 작전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기 말엽에 추진했고, 이후 정부가 바뀐 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승인해 이뤄졌다. 

 

미국은 피그만 작전에서 사전 폭격을 동반한 대규모 상륙작전까지 병행했지만 쿠바군은 이를 격퇴했다. 결과적으로 여단에 소속된 100여 명은 전사했고 남은 인원은 모두 쿠바에 포로로 잡혔다. 이후에도 미국은 카스트로 암살을 시도하는 등 끊임없이 쿠바 정부를 무너뜨리려 시도해 왔다.

 

한편 쿠바 동남쪽에 있는 관타나모 기지는 미국이 그토록 강조하던 민주주의 가치를 스스로 파괴한 ‘악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관타나모 기지에는 수감자들을 고문하는 시설인 관타나모 수용소가 있다. 미국은 이곳에 자의적 기준으로 ‘테러 혐의’가 있는 민간인을 잡아들여 온갖 끔찍한 고문을 가해 왔다.

 

관타나모 기지는 쿠바에 혁명 정부가 세워지기 전인 1903년 친미 정부가 미국에 영구 임대 방식으로 넘긴 부지에 세워졌다. 이후 들어선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정부는 미국에 관타나모 기지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여전히 쿠바에 관타나모 기지를 돌려주지 않고 있다.

 

③ 콜롬비아·파나마 (1903년)

 

미국은 1903년 콜롬비아에 군대를 보냈다. 이곳에 파나마 운하를 건설해 운하 운영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미국 등 서구 열강의 함선과 상선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오가려면 남극 근처까지 멀리 빙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콜롬비아에는 폭이 좁은 지역이 있었다. 미국은 바로 이곳에 운하를 파 자신의 군사·경제적 이권을 극대화하려 한 것이다.

 

미국은 콜롬비아에 폭이 좁은 지역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넘길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콜롬비아가 거부하자 콜롬비아를 침공했다. 한편으로 미국은 콜롬비아의 분리주의자들을 뒤에서 쥐락펴락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이 가운데 1903년 11월 18일 헤이-뷔노-바리야 조약이 체결되며 파나마가 콜롬비아에서 분리됐다. 말이 좋아 조약이지 콜롬비아는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미국의 강압에 버티다 못한 콜롬비아 정부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영토를 빼앗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국은 콜롬비아의 운하지역을 파나마라는 이름의 나라로 분리시켰다. 그리고 파나마에 허수아비 정부를 세워 운하 공사를 밀어붙였다. 미국은 1945년에 완공된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을 1999년까지 가지고 있었다. 파나마에는 대체로 미국의 말을 잘 듣는 꼭두각시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파나마 내부에서 미국에 맞선 움직임도 있었다. 1983년 집권한 마누엘 노리에가 대통령은 미국이 소유한 파나마 운하의 통제권을 되찾고 파나마의 민족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자 미국은 1989년 12월 21일 해병대 2만 3,000여 명을 동원해 파나마를 기습 침공해 노리에가 정부를 무너뜨렸다.

 

심지어 미국은 파나마의 국가원수인 노리에가 대통령을 압송해 미국으로 끌고 갔다. 또 플로리다 법정에 세워 마약 밀매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린 뒤 감옥에 가뒀다. 

 

이와 관련해 유엔은 1989년 12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미국의 파나마 침공은 “국제법과 국가의 독립, 주권, 영토 보전에 대한 흉악한 위반”이라고 규탄하며 파나마에서 미군이 즉각 철수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미국을 향해 “정복한 나라의 지도자를 사슬에 묶어 끌고 왔던 로마제국의 행태가 2000년 만에 재연됐다”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노리에가 정부가 무너진 뒤 미국이 미는 기예르모 엔다라 대통령이 집권했으나 혼란이 더욱 가중됐다. 애초 미군의 개입으로 국가원수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파나마의 상황이 안정될 리 없었다.

 

미국의 감옥에 갇혀있던 노리에가는 압송된 지 22년 만인 2011년에 본국으로 돌아왔고 2017년 사망했다.

 

④ 과테말라 (1954년)

 

과테말라 민중들은 1944년 대규모 혁명과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후안 호세 아레발로 정부(1944~1951)를 선출했다. 이어 1951년에는 하코보 아르벤스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는 미국, 미국의 이권을 대변해 온 친미 정부를 배격한 자주적인 행동이었다. 미국으로선 ▲외국 기업의 독점 해체 ▲토지 개혁 ▲과테말라 민중의 노동 조건 향상 등을 추진한 아르벤스 정부가 걸림돌이었다.

 

1954년 6월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친미 우파 군부세력인 카를로스 아르마스 일파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또 군용기를 보내 폭탄을 투하하는 방식으로 과테말라를 직접 침공했다.

 

아르벤스 정부가 무너진 뒤 대통령이 된 아르마스는 미국 정치와 기업의 이익을 대리하는 역할을 충실히 했다. 쿠데타 이후 과테말라에서는 36년 동안 민간인 학살과 내전이 계속됐고 민주주의는 무참히 파괴됐다.

 

⑤ 브라질 (1964년)

 

미국은 1961년에 출범한 브라질의 조앙 고울라르 정부를 무너뜨리려 시도했다. 고울라르 대통령은 노동당 소속으로 미국과 서방의 개입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자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0월 7일 백악관 회의에서 참모들과 고울라르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미군의 개입을 검토했다. 회의에서는 고울라르 정부가 쿠바의 카스트로 정부처럼 미국에 맞설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직접 군사 개입을 검토하던 미국은 브라질 내 친미 우파 군부세력을 활용하는 간접 방식을 썼다. 1964년 4월 미국이 지원한 친미 우파 군부세력의 쿠데타를 통해 고울라르 정부를 실각시킨 뒤 쿠데타로 들어선 새 정부를 승인한 식이다. 

 

이후 브라질에서는 1985년까지 미국의 승인을 받은 친미 우파 군부세력의 장기 집권이 이어졌다. 군부 독재 시기 미국과 친미 우파 군부세력에 반대 목소리를 낸 숱한 브라질 민중들이 학살당하고 고문받았다.

 

⑥ 도미니카공화국 (1965년)

 

미국은 1965년 4월 말부터 5월 9일 사이 4만 2,600명에 이르는 공수부대와 해병대를 동원해 도미니카공화국을 침공했다. 도미니카공화국에 억류된 미국인을 구출한다는 명분을 댔지만 거짓이었다. 미국의 진짜 목적은 이번에도 자신을 대리하는 친미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미국의 침공에는 도미니카공화국 내 친미 우파세력이 협력했다.

 

결국 미국의 개입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해 온 후안 보쉬 정부가 무너졌다. 이후 미국의 지원 아래 치러진 선거에서 친미 우파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⑦ 칠레 (1973년)

 

칠레에서는 1970년에 칠레 민중의 지지를 받은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출범했다. 특히 아옌데 대통령은 미국 등 외국 자본이 운영하던 구리 광산을 몰수하고 빈곤층의 복지를 강화하는 정책으로 신망을 받았다.

 

미국은 이런 아옌데 정부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CIA는 친미 우파 군부에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며 쿠데타를 부추겼다. 1973년 9월 11일 친미 우파 군부세력을 대표하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국 국가안보문서보관소가 공개한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쿠데타 발생 전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리처드 헬름스 CIA 국장에게 ‘칠레를 구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다. 그 내용은 아옌데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한 칠레 군부의 군사 쿠데타를 선동하라는 것이었다.

 

미국은 아옌데 대통령과 칠레 민중을 학살하고 등장한 피노체트 독재 정부의 잔혹한 학살과 고문 행위도 묵인했다.

 

피노체트가 쿠데타로 집권한 17년 동안 어린이와 청소년 1,000여 명을 비롯해 대략 4만 명이 감금, 실종, 살해, 고문 피해를 겪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1,496명은 지금까지 실종된 상태다. 피노체트 독재를 적극 지원하고 개입한 미국은 여전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⑧ 아르헨티나 (1976년)

 

미국은 1976년 친미 성향인 호르헨 비델라가 계획한 아르헨티나 군부의 쿠데타를 적극 지원했다. 당시 키신저 미국 국무부장관은 비델라에게 “우리는 당신들이 성공하길 바란다”라면서 “(미국의) 친구들은 지지를 받아야 한다. 당신들이 더 빨리 성공하면 할수록 더욱 좋다”라면서 격려까지 했다.

 

미국은 아르헨티나 군부의 쿠데타를 미리 알고 있었다. 심지어 쿠데타를 앞두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어 쿠데타를 성공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논의까지 했다. 

 

윌리엄 로저스 국무부 차관은 키신저 장관이 참석한 NSC에서 ‘아르헨티나 정부 전복 계획’을 설명하며 “군사 정부는 미국에 우호적이겠지만, 게릴라 소탕을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인권 침해 행위를 저지를 것이며 이로 인해 국제적으로 비판받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쿠데타 과정에는 CIA 요원들도 개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아르헨티나 주재 미국 대사였던 로버트 힐은 “미국 대사관은 제3자를 통해 은밀하게 아르헨티나 군부에 미국이 아르헨티나의 새 정부를 승인할 것이란 메시지를 보냈다”, “쿠데타가 일어날 때 내가 아르헨티나 국외에 있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미국 대사관과 미국 정부가 쿠데타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공작의 전모는 미국 국가안보문서보관소가 공개한 기밀 해제된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미국이 승인한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는 1983년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 아르헨티나에서는 납치와 고문 등 잔혹한 탄압이 이어졌고 약 3만 명이 실종됐다. 

 

(중남미-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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