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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범죄] ② 범죄에 의해 무참히 쓰러진 기지촌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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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5-22 22:1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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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범죄] ② 범죄에 의해 무참히 쓰러진 기지촌 사람들

김 영 란 기자  자주시보 5월 16일 서울 


미군은 한국에 발을 들인 후 끊임없는 범죄를 일으켰다. 

 

1990년대 초까지 미군기지가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 이외 다수의 국민은 주한미군 범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미군기지 주변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기지촌 사람들이라고 칭한다.

 

이번 편에서는 주한미군이 기지촌 일대에서 저지른 범죄를 살펴본다. 

 

윤금이 사건

 

1992년 10월 28일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에 있는 미군 전용 클럽 종업원이던 윤금이 씨가 피살된 채 발견되었다. 윤 씨는 온몸에 피멍이 들었고 알몸 상태였다. 또 자궁에는 맥주병 2개가, 질 밖으로는 콜라병 1개가 박혀 있었다. 또한 항문에서 직장까지 27센티미터가량 우산대가 꽂혀 있었다. 증거를 없애려는 시도였는지 전신에 하얀 합성세제 가루가 뿌려져 있었고, 윤 씨의 입에는 부러진 성냥개비가 물려 있었다.

 

너무나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토록 윤 씨를 잔인하게 죽인 사람은 당시 20살이던 케네스 마클 이병이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현장에 있던 피 묻은 셔츠와 부검 때 맥주병에서 채취한 지문 등 증거물과 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탐문수사를 편 끝에 10월 31일 오전 0시 30분경 미2사단 정문 앞에서 부대로 귀대하던 케네스 마클 이병을 유력한 용의자로 검거했다.

 

윤 씨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범인을 검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동료 기지촌 여성이었다. 

 

50대 초반의 기지촌 여성 ㄱ 씨는 기지촌여성자치회 ‘민들레회’의 감찰이었다. ㄱ 씨는 오랜 기지촌 생활을 통해 매춘 여성이 미군에게 죽어도 수사를 하거나 미군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를 통해 미군기지가 있는 기지촌에서 얼마나 많은 범죄가 일어났고, 이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ㄱ 씨는 이번에는 묻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미 2사단 앞에서 마클 이병을 기다렸다가 부대로 복귀하는 그의 멱살을 잡아 경찰에 넘겼다. 

 

하지만 경찰은 미군 측의 신병인도 요청에 따라 피의자 신문조서도 작성하지 못한 채 신병을 바로 미군 측에 인도했다. 윤 씨의 시신은 10월 30일 경찰에 의해 가족들의 입회하에 화장된 후 동두천시 상패동의 공동묘지에 뿌려졌다. 미군 당국은 위로금으로 가족에게 60만 원을 전달했다.

 

이렇게 묻힐 것 같던 윤 씨 사건은 11월 4일 동두천에서 지역대책위 결성을 시작으로 11월 5일 48개 사회단체가 모여 ‘주한미군의 윤금이 씨 살해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결성하고 살해 미군 구속 처벌 등을 요구하며 싸우면서 알려졌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공대위는 재판마다 몇백 명이 넘는 방청객을 조직하고, 사건 발생 후 5개월 동안 매주 토요일 오후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었다. 동두천시의 택시 기사들은 미군 승차 거부 운동을, 상인들은 미군 손님 안 받기 운동을 벌였다.

 

집회와 모임에서 사람들은 ‘우리의 딸 금이’가 처참하게 살해된 데 울분을 토했다. 또한 당시 대학가에서는 주한미군 범죄를 성토하는 대자보가 부착됐다. 

 

살인 혐의라고 해도 재판 절차가 끝나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 한국 사법 당국이 가해자 미군을 구속할 수 없는 게 당시 한미 SOFA 규정이었다. 검찰은 마클 이병을 살인 혐의로 기소했으나 신병인도를 받을 수 없어 구속하지 못했다.

 

1993년 2월 시작된 재판에서 마클 이병은 변호인을 통해 폭행 사실은 인정하였으나 살인 혐의는 부인하였다. 마클 이병은 1심에서 무기징역을, 2심에서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 마클 이병이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했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후 마클 이병은 한국에 신병인도 절차가 마무리된 이후 1994년 5월 17일에야 천안 소년교도소에 수감됐다. 사건 발생 1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 후 마클 이병은 수차례 가석방을 요청했으나 거부되다가, 2006년 8월 14일 가석방되었고 8월 15일 미국으로 떠났다.

 

윤금이 씨 사건은 우리 사회에 주한미군 범죄의 심각성을 알렸고, 한미 SOFA의 문제점을 알렸다.

 

  © 동두천시민연대

 

마클 이병 1차 공판이 끝난 후 미군 범죄에 대처할 상설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라 공대위는 ‘주한미군 범죄 근절 운동본부’로 전환되었다. 미군 범죄가 우리 사회 문제로 인식된 것은 1992년 윤금이 씨 사건 이후다. 

 

윤금이 씨 사건 이후로 불붙은 한미 SOFA 개정 운동은 근 10년 이후에나 이뤄졌다. 2001년 한미 SOFA 개정을 통해 살인·강간 등 중대범죄 12종에 한해 한국 검찰이 피의자의 신병을 우선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이기순·허주연 사건

 

윤금이 씨 사건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기지촌 여성을 살해한 사건은 더 있다. 

 

1996년 9월 7일 이기순 씨가 예리한 흉기로 목이 반쯤 잘린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연필 깎는 칼과 같은 작은 칼로 목이 반쯤 열리도록 잘라 놓은 잔인성과 사건 장소가 미군기지 인근이라는 점, 군화 발자국 등으로 미군 소행임을 짐작하였다. 

 

범인은 미2사단 소속 뮤니크 에릭 스티븐 이병으로 경찰에 의해 9월 11일 검거되었다. 처음에 자신의 알리바이를 주장하며 범행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던 스티븐 이병은 한국 경찰이 택시 운전사를 비롯한 목격자들과 대질신문하며 추궁하자 범행 일체를 자백하였다.

 

1996년 10월 10일 검찰은 법원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미군 측에 스티븐 이병의 구금인도 요청서를 전달했다. 한국 수사당국이 기소 전에 신병인도를 요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11월 5일 미군 측은 신병인도에 대해 공식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는 한미 SOFA를 반드시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더 분출시켰다.

 

스티븐 이병은 사건 발생 두 달 후인 1996년 11월 11일 불구속기소 되었고 12월 27일에 한국 법정에서 첫 재판을 받았다. 스티븐 이병은 1심에서 징역 15년 형을, 2심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스티븐 이병은 상고했으나 대법원이 기각했다. 

 

그 후 한국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스티븐 이병은 2005년 2월 28일 가석방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허주연 씨 사건은 1998년 1월 16일 발생했다.

 

1998년 1월 15일 오후 10시께 허 씨는 자신이 일하는 클럽에서 미군 헨릭스 티모시 제롬 병장을 만나 함께 술을 마셨다. 

 

16일 새벽 허 씨의 자취방에 불이 났다. 놀란 집주인이 허 씨의 자취방에 들어갔을 때, 이미 허 씨는 사망한 상태였다. 

 

범인은 제롬 병장이었다. 제롬 병장은 오른쪽 팔꿈치로 허 씨의 명치를 때려 숨지게 하였고, 이어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허 씨가 누워있던 침대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의정부 경찰서는 1월 23일 제롬 병장을 체포하였고 미 헌병대에 신병을 인계하였다. 

 

제롬 병장은 1심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미제 사건들

 

1999년 9월 7일 경기 동두천에서 미군과 동거 중이던 이정숙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시신은 심하게 부패된 상태였으며, 현관문과 방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 평소 이 씨가 교제하던 주한미군 병사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나, 명확한 증거와 수사 미진, 한미 SOFA의 한계 등으로 인해 진상 규명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2000년 3월 11일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서정만 씨가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68세였던 서 씨는 두 눈과 입술에 피멍이 맺혔고, 이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모두 부서졌다. 방 안은 피범벅이었다. 

 

사건을 맡은 의정부 경찰서는 3월 10일 서 씨가 키 180센티미터가량의 흑인 미군과 방으로 들어간 뒤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는 주민 진술에 따라 미군 범죄수사대와 공조해 수사에 나섰다. 목격자의 진술과 정황증거는 범인이 미군일 가능성을 높여줬지만 끝내 범인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초동수사에서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고, 미군과의 공조수사도 형식적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2002년 8월 경찰은 미군 측이 ‘2002년 1월 유력 용의자가 사건 이틀 후 미국으로 출국했음’을 알려왔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1996년 3월 정종자 씨 사건(대구), 1998년 8월 박순녀 씨 사건(군산)도 주한미군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증거가 부족하고 미군이 수사 협조를 소극적으로 해서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

 

폭행 사건들

 

1993년 12월 16일 0시 20분경 경기도 파주시 에드워드 미군기지 주변에서 택시 기사인 한창열 씨가 미 제2사단 제82지원부대 공병대 소속의 2명의 미군으로부터 폭행당했다. 

 

한 씨는 에드워드 부대 앞에서 두 명의 미군을 택시에 태웠다. 한 명은 앞 좌석에, 한 명은 뒷좌석에 앉았다.

 

승차 후 두 명은 범행을 모의하고 택시가 2킬로미터가량 운행했을 때 뒷좌석의 주한미군이 다짜고짜 칼로 한창열 씨의 목을 찔렀다. 한 씨는 목에 꽂힌 칼을 빼앗고 소리치며 차를 정차시키자 미군들은 차 문을 열고 도주했다. 다행히 한 씨는 지나가던 택시 기사의 도움으로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다. 한 씨는 네 번째 목뼈가 부러지고 척추부 신경이 부분 파열되는 등 전치 12주 이상의 치료해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두 명의 주한미군은 각각 징역 5년과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94년 9월 8일 오후 11시 55분경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에서 박수근 씨와 김동환 씨, 변기웅 씨가 주한미군 10명에게 폭행을 당했다.

 

미군 2사단 소속의 버클리 엔더니 이병 등 주한미군 10명이 보산동 아리랑 식당 앞길에서 길가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훔치려다가 발각됐다. 박 씨가 제지하자, 엔더니 이병이 갖고 있던 체인으로 박 씨를 폭행했다. 그리고 이를 말리는 김 씨와 변 씨를 주한미군이 철제의자, 돌 등의 흉기를 사용해 집단 폭행했다. 

 

주한미군들은 범행 후 달아나다 이들 중 3명이 근처에 있던 시민들에 의해 잡혀 한국 경찰에 넘겨졌으나, 한미 SOFA에 의해 미군 당국이 신병을 인도했다.

 

박 씨는 복숭아뼈가 골절되는 등 전치 8주 이상의 중상을 입었고, 변 씨는 전치 3주 이상의 진단을 받았다. 김 씨는 주먹으로 코를 맞아 코뼈가 주저앉는 등 전치 4주 이상을 진단받았다. 미군의 처벌과 배상 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1995년 7월 4일 오후 9시 30분경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에서 조기덕 씨와 그 일행이 주한미군 3명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조 씨는 승용차를 몰고 동두천시 보산동 뉴코리아 앞을 지나고 있는데 술에 취한 주한미군 3명이 술병을 들고 그곳을 지나다가 조 씨의 승용차 백미러를 주먹으로 부쉈다. 

 

이에 조 씨와 친구가 차에서 내려 주한미군에게 왜 백미러를 부수냐고 항의하자, 주한미군이 친구를 폭행하여 기절시켰다. 이를 보고 조 씨가 항의했다. 3명의 주한미군은 조 씨의 얼굴과 가슴 등을 폭행했고, 조 씨도 기절했다. 조 씨는 오른쪽 광대뼈가 모두 으스러지는 등 전치 6주의 진단을 받았고, 친구는 전치 2주의 진단을 받았다.

 

1995년 7월 7일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에서 원근자 씨가 주한미군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이날 오전 8시경 주한미군은 원 씨가 운영하는 강변상회에 음료수를 사러 왔다. 당시 주한미군은 음료수 한 병을 사면서 20달러를 냈다. 주한미군은 거스름돈을 받으면서 원 씨에게 돈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원 씨는 57만 원과 400달러를 지니고 있었다. 

 

그 주한미군은 약 1시간이 지난 오전 9시 20분경 다시 가게에 들러 이곳저곳을 훑어 보고 40분쯤 가게에 앉아 있다가 갔다. 오후 3시 40분경 작은 가방 하나와 검정 비닐에 싼 벽돌을 가지고 주한미군이 다시 가게에 들렀다. 어슬렁거리던 미군은 가게로 들어와 물을 달라고 한 후 원 씨가 가게 옆에 딸린 부엌으로 들어가 컵을 찾자, 갑자기 검정 비닐에 싼 돌로 원 씨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너무나 놀란 원 씨가 얼떨결에 방으로 도망을 치자 뒤쫓아온 미군이 돌로 얼굴과 오른쪽 턱 아래를 쳐서 원 씨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주한미군은 원화와 달러를 훔쳐 도망을 쳤다. 

 

원 씨는 전치 8주의 진단을 받았다. 

 

위에서 언급한 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주한미군이 저지른 범죄는 더 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기지촌 사람들의 경우 늘 주한미군과 접할 수밖에 없기에 경찰에 신고하기도 어렵다. 또 신고한다 하더라도 한미 SOFA로 인해 주한미군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 

 

미군이 한국에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 국민은 범죄에 노출됐다.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

 

다음 편에서는 주한미군이 저지른 성폭행 사건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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