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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문서로 드러난 518의 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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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5-20 04:11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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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문서로 드러난 518의 배후          글쓴이 : 곽동기 상임연구원

 

 오늘은 5.18 광주항쟁 36주기입니다. 지난 4월 17일에 공개된 외교문서가 다시 주목됩니다. 미국이 5·18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정권의 불가피성을 인정한 외교문서가 공개되었던 것입니다.

 

1979년 부마항쟁의 여파로 10월 26일, 군부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12월 12일, 전두환의 새로운 쿠데타를 바라봐야했습니다. 국민들은 강력하게 저항하였습니다. 전두환은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선포하면서 80년 ‘서울의 봄’을 짓누르려 하였지만 5월 18일, 광주에서는 전두환 신군부를 반대하는 투쟁으로 타올랐고, 이는 그대로 5.18 광주항쟁으로 폭발하였습니다.

 

일개 소장 계급의 전두환이 어떻게 군부를 움직여 신군부 세력을 규합해 쿠데타를 벌이고, 광주시민을 무참히 학살하고도 뻔뻔하게 집권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미국의 지지와 후원, 방조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518의 배후는 미국

 

외교부가 지난 4월 17일에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1980년 8월 29일 박동진 외무부 장관과 면담에서 "미국 행정부는 이번(에) 전(두환) 장군께서 대통령에 취임하시게 됨은 한국의 국내 정세 흐름으로 보아 불가피한 것이며, 다른 대안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므로…"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을 한국정부로 인정한 것은 미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나라 국민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은 바로 “미국의 전두환 정권 인정”이 있었기에 집권기반을 구축하고 7년간 군부독재를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전두환 신군부를 막후에서 사주하였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은 1980년 5월 당시 정국에서 음으로 양으로 전두환 신군부를 후원하였습니다.

 

1980년 5월 7일, 당시 주한 미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이 워싱턴 국무부로 보낸 비밀전문에는 다음의 비밀사항이 들어있었습니다. 

 

 

 

 

“한국군은 돌발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병력이동을 미군 사령관에게 알려왔음. CFA 산하 13특전여단을 5월 8일 임시임무수행을 위해 서울남동쪽 특전사령부로 이동하며, 11특전여단을 5월 10일 김포반도로 이동 재배치할 것임, 2개여단의 병력은 2천5백명이며 학생소요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할 것임” 

 

이 대목을 보면 미국의 승인이 없이는 12.12 쿠데타도, 5.18 광주항쟁 진압도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국군의 평시 작전통제권이 대한민국 청와대에 있지만, 평시 작전통제권이 한국정부에 이양된 것은 1994년의 일입니다. 1980년 5월은, 평시에도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한미연합사에 있었습니다. 사실상 주한미군사령관이 국군의 지휘권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계엄군이 시위진압을 위해 병력이동을 하자고 하여도, 병력 이동을 사전에 주한미군 측에 보고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결국 미국은 계엄군의 행동 내역을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엄군의 이동은 주한미군이 암묵적으로 승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의 내용을 봅시다. 글라이스틴은 포항주둔 해병대 1사단의 대전 및 부산 투입가능성에 대해 “해병대 1사단은 한미연합사 [CFC] 통제하에 있으며 이동시 미국 승인 [US APPROVAL]이 필요하다. 이동 승인요청은 없으나 그러나 요청시 동의하게 될 것임[WOULD AGREE IF ASKED]”이라고 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한미대사가 한국정부나 신군부의 병력 이동승인요청이 아직 없었는데도, “요청하면 동의하게 될 것”이라면서 병력이동을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쯤되면 미국은 전두환 신군부의 완전한 공범입니다. 아무리 동맹국이라 하더라도, 외국 대사와 외국군 사령관이 국내 쿠데타에 병력승인을 검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명백한 내정간섭이며 외부세력에 의한 반란, 즉 ‘외란’입니다.

 

518 광주항쟁에 대해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신군부만 처벌받을 것이 아닙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으로서 한국군의 병력이동을 최종 승인한 위컴과 ‘80년 서울의 봄’의 긴박한 정국을 시시각각 워싱턴으로 타전하며 신군부를 후원한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도 당연히 처벌해야 합니다.

 

미국은 몇몇 문서쪼가리로만 신군부를 후원한 것이 아니라 실질병력을 동원해서 전두환을 뒷받침했습니다. 광주항쟁에 대한 계엄군의 진압이 준비되던 5월 25일, 미국은 7함대 소속의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부산항에 입항시키며 신군부를 지원하였습니다. 전두환이 전방부대의 병력을 후방으로 빼돌려 시민을 학살하면 전방지역의 안보불균형이 형성될 수 있는데 이 경우에 대비하여 미국이 항공모함 코럴시 호를 부산에 진입시켜 휴전선 안보공백을 사전에 막으려 한 것입니다. 이는 곧 전두환 신군부에게 “북한 신경쓰지 말고 광주시민들을 마음놓고 진압하라”는 미국의 메시지였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미국은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르자마자 전두환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레이건과 정상회담을 하였고 전두환은 이 사실을 한국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집권기반을 구축하였습니다.

 

독재정권과 친밀한 미국

 

그렇다면 미국은 1980년에 왜 전두환 신군부를 지원했을까요?

 

1970년대 말은 미국의 세계패권이 흔들리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1975년에 베트남전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였습니다. 1979년에는 2차 석유파동이 세계경제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1979년, 중동의 이란에서는 회교혁명이 일어나 친미정부였던 팔레비왕조가 붕괴되고 호메이니 회교정권이 구성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핵을 두고 미국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미-소 냉전의 대결구도에서 1991년에 소련이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으로 먼저 무너진 것이 미국에겐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던 것입니다.

 

이란을 잃었다고 여긴 미국은 “80년 서울의 봄”을 그대로 용인할 경우, 대한민국에 통일지향적인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을 가장 우려하였을 것입니다. 미국은 지금껏 지속해왔던 한반도 군사적 위기를 지속하는 정권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바로 전두환 신군부였습니다.

 

 

 

 

미국은 역대로 제3세계의 독재정권을 음양으로 후원해왔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투루히요 정권이 그러하였고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이 그러하였습니다. 칠레의 피노체트,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 이집트의 사담 후세인 정권, 파나마의 노리에가 정권, 그리스의 파파도풀로스 정권, 과테말라의 아르마스 정권, 앙골라의 사빔비 정권, 엘살바도르의 두아르테 정권, 패망한 월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이 그러하였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미국은 대한민국에서 박정희 군부독재를 후원하였고, 전두환 신군부를 지원하였습니다.

 

반면 미국은 6.15 공동선언을 성사시킨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서는 “This man”이라며 외교적 무례를 범하였고 한반도 평화번영을 추진한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서는 한미동맹의 위기를 언급하였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5.19 광주항쟁을 낳은 신군부의 빽은 바로 미국 아닌가요? 전두환은 대한민국의 사담 후세인이었고, 대한민국의 피노체트였으며 대한민국의 노리에가이자 대한민국의 무바라크였던 것입니다. <끝>

 

 

[출처: 우리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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