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일 소장의민족주의적 통일담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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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3-31 01:5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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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담론과 민족주의
<특별기고> 정수일 소장의 ‘민족주의적 통일담론’ (1)
정수일 /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 통일뉴스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 소장의 ‘민족주의적 통일담론’을 게재한다. 주지하다시피 정 소장은 세계적인 문명교류학자다. 그러기에 독자들은 ‘문명교류학자가 왜 민족주의와 통일담론을?’ 하고 의아해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저변에는 시종일관 민족 문제가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는 일찍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명교류학 연구를 하게 된 동력이 ‘민족주의’임을 밝히면서, “일생을 통틀어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문명교류학과 민족주의”라며 “분단은 가장 큰 비극이며 이제 남북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통일을 해야 할 때”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궁극적으로 민족주의에 근거해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필생의 업인 문명교류학의 고지(高地)를 넘은 그가 만년에 이르러 또 하나의 필생의 업인 통일 문제에 천착해 이제 내놓는 ‘민족주의적 통일담론’은, 다가올 한반도 통일시대에 대비해 솟구칠 통일방안 수립에 있어 어떤 시사점을 제시해 줄 것이다. 이 특별기고는 아래와 같이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민족주의적 통일담론>
Ⅰ. 통일담론과 민족주의 (여는글 포함) / 3월 30일 (월)
Ⅱ. 민족주의는 통일담론의 철학적 기조 / 4월 2일 (목)
Ⅲ, 통일담론의 2중 패러다임 / 4월 6일 (월)
Ⅳ. 민족주의적 합의통일 (닫는글 포함) / 4월 9일 (목)
여는글
70여년의 분단사는 8천만 우리 민족의 5천년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가장 비극적인 사회적 의제(議題)다. 그간 이 의제를 이론 실천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이른바 ‘통일담론’에서는 여러 가지 접근방법이 제기되어 왔다. 그 한 가지가 학술모임이나 연구저술 같은 학문적 접근방법이다. 주로 전문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된 이 접근방법을 학문적 계보에 준해 분류한다면 크게 정치학이나 경제학, 법학에 주안점을 둔 사회학적 접근방법과 역사학이나 철학, 민족학에 초점을 맞춘 인문학적 접근방법의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숱한 학문적 논저들을 얼추 추려 봐도 인문학적 저술에 비해 사회학적 저술이 분량 면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우세하다. 문제는 단순한 양적 비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분단과 통일 같은 민족의 운명과 직결된 중차대한 사회적 의제를 놓고 다분히 사회학적, 기능주의적 접근에 치우친 나머지 문제의 본질 파악에서 저만치 동떨어져 있음을 갈파하게 된다. 물론 통일방안을 비롯한 통일담론에서 기능주의적이며 시류영합적(時流迎合的)인 전략이나 전술, 정책 같은 방책을 사회학적 시각에서 논급하고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미흡하며 담론에서 편파성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일국의 민족적 분단이나 통일 같은 사활이 걸린 중대한 사회적 의제는 반드시 심원한 역사적 배경에 바탕해서 일관된 해석과 해결의 지혜를 제공하는 철학적 논리와 지침이 안받침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족적 통일 같은 사회적 의제는 사회학과 인문학, 기능주의와 원리주의, 실천과 이론의 연구나 제언이 시종일관 균형 속에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질 때만이 비로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기수부지의 통일담론을 훑어보면, 전술한 바와 같이 사회학적 접근이 대세를 이루지만, 더러는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한 담론도 눈에 띈다. 10년 전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산하에 출범한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IHU)은 ‘과정으로서의 통일’과 ‘사람의 통일’이라는 통일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구체적으로 ‘소통 ․ 치유 ․ 통합’이란 아젠다를 제시하고 연구사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근간에는 ‘사회와 철학연구회’ 소속 철학자들이 분단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란 제하의 유의미한 논저를 펴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균형 잡힌 통일담론의 장을 열어가는 단서로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은 ‘시도’나 ‘단서’의 단계로서 논리가 애매모호하고 전개가 얄팍하며 지향점이 명확치 않는 등 시급히 시정해야 할 흠결을 노정시키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심히 우려되는 것은 낯선 서구의 민족이론을 여과 없이 통째로 삼켜버리는 폐단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작금 ‘진부한’ 이념으로 치부되어 언급마저도 껄끄러워하거나 금기시하는 인문학의 ‘유기아(遺棄兒)’로 홀대되는 민족주의를 통일담론의 철학적 기조로 삼아 담론의 광장에 당당히 등장시키고자 한다. 그 전제는 민족주의야말로 역사의 보편적 가치이며 진보주의라는 나름의 지론이다. 여기서의 ‘나름의 지론’이란, 민족주의에 대한 일부 논자들의 터무니없는 무지와 오해, 남용과 악용의 행패로부터 필자가 나름대로 터득한 민족주의 본연(本然)을 통일담론에서 오롯이 복원하고 재생해야 한다는 신념이며 의지다.
이러한 ‘나름의 지론’에 준해 국내에서 분단이나 통일에 관해 개진된 기존의 숱한 담론이나 저술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사회학적 접근이나 인문학적 접근, 또는 진보학계나 보수학계를 막론하고 민족주의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시각이나 방법에서 거의나 진배가 없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서구학계에 대한 추미주의에 안주하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간혹 불가피한 대목에 가서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민족주의’를 언급하는 경우에마저도 마지못해 곁들이는 한두 마디 삽입어 정도에 불과할 뿐, 그에 관한 필요한 해설이나 전개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민족주의는 여기 통일담론에서도 도외시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언필칭 ‘민족통일론’을 논하는 마당에서조차 민족론의 2대 구성요소의 하나로서 민족통일의 철학적 이념을 기제하는 민족주의를 이렇게 자의(恣意)로 무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민족통일 담론에서 그 복원적 및 계승적 재생이 더더욱 절실한 것이다.
Ⅰ. 통일담론과 민족주의
한반도의 분단사는 지리적 국토 양단(兩斷)과 정치적 국가 분립(分立), 그리고 이에 따르는 민족 분열의 중층적(重層的) 과정을 함축하고 있으며, 모두가 ‘갈라짐’이란 뜻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양단’과 ‘양립’, ‘분열’의 3가지 ‘갈라짐’을 ‘분단’이란 하나의 표현으로 개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민족구성원들 간의 동태적인 분열은 정태적인 국토 양단이나 국가 분립과는 다르게, 분단사에서 보다 역동적으로 기능함으로써 통일담론에서는 민족분단이 시종 민감한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그런데 민족분단 문제는 민족에 대한 신념과 입장을 가늠하는 민족주의 담론에 의해 결정된다.
민족주의 담론은 민족주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하는 시원론과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 하는 전개론, 그리고 각이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어떠한 기능을 수행해 왔는가 하는 기능론의 세 가지를 주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한반도의 경우, 민족의 탄생이나 민족주의 전개는 오랜 역사적 연원과 경륜을 지니고 있지만, 그 심층적 연구는 일천하다. 그마저도 주로 서구 유학파들에 의해 주도되다나니 한반도의 현실, 특히 분단 현실과는 동떨어진 사이비 주의주장들이 무분별하게 난무하고 있다. 그 결과 민족의 실체나 민족주의의 본질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서구 학계의 선입견적 영향을 받아 대부분의 논자들은 분단 현실에 대한 민족주의적 탐구를 기피하거나 소홀히 하는 경향이 짙으며, 진지하고 실사구시적인 학풍도 결여되어 있는 것이 현주소다. 이러다보니 통일담론은 민족주의에서 응분의 이념적 자양분을 섭취하지 못한 채 구태의연한 속론(俗論)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1. 통일담론 속의 오도된 민족주의
분단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지향한 한 저술에 발표한「한국인의 새로운 민족주의」란 제하의 글에서 저자는 민족주의와 그 양면성에 관한 서양철학자들의 오도된 주장을 다음과 같이 고스란히 옮겨놓고 있다. 즉 “민족주의는 양면성을 갖는다. 민족주의는 야누스(Janus, 로마의 문 수호신-필자)의 얼굴처럼 두 면을 가진다. 민족주의는 잠자는 미녀로 시작하여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괴물-필자)으로 끝난다. 민족주의는 그 신․구형을 막론하고 패러독스(paradox, 역설, 모순된 논리)로 가득 찬, 극도로 복잡한 역사적 현상이다. 도덕적인 동시에 비도덕적이고, 인간적인 동시에 비인간적이며, 고상한 동시에 야만적인 민족주의는 축복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다.”, “민족들이 깨어나 자기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발명한다고 말한다.”, “민족주의는 신화요 이데올로기라고 잘라 말한다. 그것은 허위의식이며,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라고 못박는다.”, “민족주의 원형은 없다. 파시즘이야말로 어느 에피소드보다도 민족주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가족을 검정고양이들과 흰고양이들, 그리고 몇몇 잡종들로 분류할 수는 없다. 전 가족이 예외 없이 얼룩이들이다. 온갖 형태의 ‘비합리성(편견, 감상주의, 집단적 자기중심주의, 침략성 등)’이 그들 모두를 더럽히고 있다.”
오도를 넘어 악의적이기까지 한, 그리고 조잡하고 지루한 글이지만 저자의 궁극(窮極)을 알아차리기 위해 그대로 이렇게 인용해 봤다. 우리는 이 글에서 민족주의 개념에 관한 서구인들의 극히 부정적이고 이중적인 오해를 갈파할 수 있다. 즉 개념에서는 민족 구성원 개개인의 삶에 체화된 의식구조가 아니라, 국가주의에 충실한 이념으로 정의되고 있으며, 민족주의의 원초적 속성 같은 것은 아예 언급이 없다. 또한 상극적(相剋的)인 양면성을 일방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비합리성 일면을 터무니없이 강조한다. 마치 그러한 비합리성이 민족주의의 본질인양 호도되고 있으며, 따라서 민족주의는 인위적이며 허위적인 의식이라고 낙인찍는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을 파시즘에 환원(還元)시키고 있다. 지어 어이없게도 민족의 의식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발명’한다는 인과전도(因果顚倒)의 역설(逆說)까지를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서방민족주의 추종자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요로(要路)마다에 도사리고 앉아 이른바 민족주의의 권력지향성이나 사회운동성, 반계급성, 반자유의성 등 이른바 ‘부당한 기능론’을 거론하면서, 민족주의의 폐기론을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다.
이어 이 논자는 기본상 서구민족주의를 잣대로 하여 한국인이 겪은 몇 가지 민족주의 경험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형화하고 있다. 그는 한국인은 오랜 역사를 살아오면서 민족주의의 여러 유형을 복합적으로 경험했다고 전제하면서, 그 첫째로 한국의 민족주의는 순수한 혈통을 바탕으로 하는 ‘종족민족주의의 희귀한 사례’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과 일본은 인구의 99%가 같은 종족이며 중국은 94%가 순수 종족이고, 동아시아의 이 세 나라는 ... 희귀한 종족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이다”라고 이집트 출신의 경제사학자 홉스봄(E.J.Hobsbawm)의 억설(臆說)을 그대로 원용(援用)하고 있다. 동아 3국은 다민족(종족) 국가로 ‘같은 종족’이나 ‘순수 종족’의 공동체가 결코 아니라는 초보적인 역사적 사실마저도 무지한 이런 식 낭설은 일고의 반박할 가치조차도 없다.
이어 저자는 역사의 보편가치로서의 민족주의가 지니고 있는 불변의 본질은 무시한 채 한국 민족주의를 그 변천과정에 따라 사이비적(似而非的)인 명칭을 들씌워 다음과 같이 유형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가 내세운 유형화를 보면, 순수 혈통에 의해 산생한 ‘종족민족주의’와 때를 같이해 반제독립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저항적 민족주의’가 탄생하였다. 광복 후에는 군사독재자들에 의해 ‘극우민족주의’시대가 도래하였는데, 이 시대에는 민족의 정신적 문화유산과 민족적 정통성이 경제력과 무력을 키우기 위한 왜곡된 수단으로 전락됨으로써 배타적인 국수주의와 자민족우월주의, 그리고 군사독재가 횡행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분단의 장벽은 높아지기만 하였다. 이러한 극우민족주의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맞이한 시대는 바로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평등과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통일국가 민족주의’시대다. 이 시대의 민족주의야말로 만민이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민족주의’며, 보편적 세계주의와 맞닿은 ‘개방적 민족주의’다.
보다시피 저자는 일관된 내재적 구조를 가진 민족주의를 시류영합적(時流迎合的)으로 무슨 ‘종족민족주의’니, ‘저항적 민족주의’니. ‘극우민족주의’니, ‘통일국가 민족주의’니, ‘미래지향적 민족주의’니, ‘개방적 민족주의’니 하는 등 극히 모호한 개념으로 유형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이비적 유형화는 애당초 불가한 전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시도는 무위(無爲)에 그칠 수밖에 없다. 즉 역사적 및 진보적 보편가치로서의 민족주의의 본연의 속성에 반하는 보수성, 배타성, 폐쇄성, 반역성, 종족성, 극우성 같은 부정적 ‘악성(惡性)’으로 민족주의를 아무런 논리적 근거 없이 임의로 재단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종족민족주의’니 군사독재자들에 의한 ‘극우민족주의’니 하는 것은 민족주의 유형이 아니라, 민족주의에 대한 왜곡이다. 순수하고 참된 ‘민족주의’ 일어(一語)와의 무분별한 접두(接頭) 결합어는 있을 수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민족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민족배타주의’는 있어도 유형화로서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통일담론을 제외한 사회학이나 정치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논제로 다뤄지고 있다. 이 분야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원인은 한국에서의 민족주의가 차지하는 현실적 중요성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최강의 이데올로기’이고, ‘부침(浮沈) 없는 지존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정치이념이며, ‘대중의 정서’가 깊이 뿌리박고 있는 이념이다. 그리하여 각양각색의 인위적이며 사이비적인 민족주의가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그 명칭만도 문화적 민족주의, 정치적 민족주의, 시민적 민족주의, 내생적 민족주의, 외생적 민족주의, 민족 없는 민족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열린 민족주의, 나치즘적 민족주의, 분단 민족주의, 혁명적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 등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역사 변화에 노출되어 타 이념들과의 혼재를 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이념적 논리와 내재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 민족주의를 교조적으로, 비논리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마구 두부모 자르듯 유형화하는 것은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무지나 오해, 남용이나 악용에서 비롯된 경솔한 오판이다.
2. 한민족 동질성의 균열과 통일
민족동질성이란 민족 구성의 주․객관적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 민족이 분열되었을 때 통일의 당위성을 이러한 민족동질성의 복원에서 찾는 것은 원론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한민족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그런데 작금 이러한 당연지사가 뿌리째 흔들리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란 체제의 이질성에 의해 여러 가지 민족구성 요소를 공유하고 있는 민족동질성에 침식과 균열이 생김으로써 더 이상 한 민족이 아닌, ‘타민족’인양 분화되어가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한심한 현실에 맞닥치고 있다.
타민족론(실제는 분족론)자들은 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주․객관적 요소들의 공통성(공유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반면에, 이질성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남북한이 더는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개의 민족이라는 그릇된 주장을 공공연히 퍼뜨리고 있다. “같은 민족이라는 것은 군더더기로 보인다.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면 충분하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사회에 살고 있는 남과 북의 주민이 과연 하나의 민족국가를 형성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민족국가를 이루는 것이 두루 행복이 될까?”, “북의 핵실험을 계기로 해서 우리는 민족이라는 마술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민족이란 문화공동체인데, 이제 남북은 ‘판이한 제도와 경제구조로 인해 더 이상 문화적 유사성을 공유하는 문화공동체’가 아니다. 이제 핏줄로도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없으니 ‘단일민족이란 근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한마디로, 남북한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근거’를 민족 구성요소들의 공통성, 특히 경제제도와 경제수준에서 오는 공통성의 상실에서 찾고 있다.
물론 남북한 간에는 경제제도나 경제수준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차이 때문에 민족구성의 주요한 요소의 하나인 경제적 공통성이 이미 사라졌으며, 나아가 그로 인해 남북한은 더 이상 하나의 민족으로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인가? 흔히들 피상적으로 ‘그렇듯 하다’고 수긍하지만, 과연 그러한가를 한번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원래 민족 구성 요소로서의 경제적 공통성이란 단순한 경제제도나 경제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기층구조(농업이나 상공업 등)와 경제생활(주로 의식주), 그리고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지리적 환경(기후와 부존자원 등)의 3대 요인에서 나타는 공통성을 말한다. 역사적 경험이 보여주다시피, 봉건제도나 자본주의제도 같은 각이한 경제제도나 경제수준을 겪으면서도 경제적 공통성은 시종일관 소실되지 않고, 민족구성 요소로서의 원초적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위의 3대 요인 때문이다. 지금 남북한 간의 경제적 소통이나 경제제도 및 경제수준의 상호 보완 같은 것이 여의치 않지만, 이 3대 요인에 바탕한 기본적인 경제적 공통성(동질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경제제도나 경제수준의 단순한 상차를 ‘근거’로 남북이 하나의 민족이란 단일민족설을 부정하고 타민족론을 주장하는 것은 섣부른 오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혈연이나 언어, 문화 등 다른 면에서의 남북한 간의 차이와 공통성 문제에 관해서도 이와 같은 실사구시한 문제의식으로 접근한다면, 틀림없이 바른 이해가 도모될 것이다. 이것은 타민족론이나 남북관계가 이제는 형제나 혈육관계가 아니라 ‘친구관계’라는 이른바 ‘친구론’ 같은 반민족론, 반통일론을 극복하는데서 유력한 이론적 무기가 될 뿐만 아니라, 통일운동의 활력소로도 작용하게 될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남북한은 하나의 동질민족으로, 친구 아닌 형제로, 혈육으로 살아 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신념과 공감(共感)이 없이 ‘민족이 다시 하나됨’을 외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3. 민족주의의 바른 이해
통일담론의 근본적인 사상이론적 기반과 그 지향점을 거시적인 시각에서 통찰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느 사회적 의제와 마찬가지로 그 철학적 기조(基調)를 밝혀야 한다. 무릇 사회적 의제라면 그 해명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철학적 기조를 오롯이 구비해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의 통일담론에서는 그 기조 탐구가 논제에 오른 일이 별로 없으며, 따라서 그 기조를 심층적으로 명명백백하게 명문화한 개념 정립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간혹 있다면 표피적인 천박한 각인각설에 불과해 철학적 접근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해 필자는 민족통일 담론의 철학적 기조를 구체적으로 밝히기에 앞서 민족주의 개념 정립부터 제시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후술하겠지만 필자가 주장하는 통일담론의 철학적 기조는 민족주의의 3대 기본속성의 구체적 발현(發現)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민족론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는 2차 이데올로기 때문에 완벽한 논리적 구조를 갖출 수 없고, 여러 민족들이 겪는 경험이 다양하므로 보편적 이론합의에 이를 수 없으며, 운동의 방향에 따라 조작되기 쉽고 다분히 감성적이기 때문에 민족주의 개념 정립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이러한 서구의 개념 정립 불가론에 편승해, 국내의 연구자들 대부분도 일단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간주하면서, 근대의 흐름과 더불어 일시 생겨났다가 살아져야 할 진부한 이데올로기로, 그리고 국제화에 역행해 숱한 폐단을 양산하는 ‘반역(反逆)’으로 폐기해야 한다고 서구의 반민족주의론을 복창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필자는 민족주의야말로 정연한 논리적 체계와 내재적 구조를 갖춘 이념이고 의식구조이며 생활모습이라고 확신한다. 내재적 속성으로 인해 역사성과 보편성, 역동성을 함께 구비하고 있는 민족주의는 다른 주의와는 달리 어떠한 한시적(限時的)인 시류(時流)나 흥행물이 아니라, 통시적(通時的)인 역사과정에서 형성 축적된 역사와 생존의 보편가치다. 또한 민족주의는 2차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진보사상과 이념에 편재(遍在)하며, 그것들을 아우르는 보편적 진보주의다. 어떤 이는 민족주의자와 진보세력은 짝일 뿐이라고, 그 관계를 동반자 관계쯤으로 설정하면서 민족주의의 ‘부정적 면’을 제거하는 이른바 ‘민족주의 환골탈태’를 부르짖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를 넘어선 사람(진보주의자)과 넘어서지 못한 사람(민족주의자)으로 편을 가르기까지 한다. 이것은 민족주의 보편가치에 대한 몰이해와 왜곡에서 비롯된 일종의 편견이다.
민족주의의 ‘부정적 면’이란 표현 자체가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역사적 보편가치로서의 민족주의는 무슨 긍정적 면과 ‘부정적 면’이 따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혹여 있다면 미숙한 민족주의자가 민족주의를 이해하거나 실천하는 과정에서 노정시킨 부족점이나 부정적 면일 것이다. 의미론적으로 본연과 본연에 대한 일탈(逸脫)은 천양지판(天壤之判)이다. 물론 그러한 일탈적인 부정 면이 있어서 환골탈태하는 데는 이의(異意)가 따로 있을 수 없다.
흔히들 서구적 개념에 따라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를 상극적으로 대치시키면서 민족주의는 보수로, 국제주의는 진보로 흑백논리화 하고 있는데, 이 역시 명백한 착각이다. 필자의 천협(淺狹)한 체험으로서도 감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는 결코 서로가 어긋나지 않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진정한 국제주의자이며, 참된 국제주의자는 참된 민족주의자라는 확증된 사실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이라는 것은 역사적 경험이 응축된 동서고금의 균형 잡힌 대명제다. 작금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이 대명제의 본의가 희석되거나 말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상의 각론을 모아 포괄적으로 민족주의 개념 정의를 내려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민족주의는 민족 구성원 간의 연대의식과 민족수호 의지 및 발전지향성을 추구하는 민족의 이념적 표상으로서, 민족 구성원 개개인의 삶에 체화(體化)된 의식구조이며 구체적 생활모습이다.
이 민족주의 개념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 연대의식과 민족수호 의지 및 발전지향성을 민족주의의 3대 근본속성으로 규정하면서, 민족주의는 관념적 이념(사상, 이데올로기, 주의 등)일 뿐만 아니라, 자체의 정연한 내재적 논리구조와 규범을 갖고 있는 의식구조이며, 추상이 아닌 일상의 생활과 활동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생활모습과 태도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민족주의 개념을 이해하는데서 가장 큰 폐단의 하나는 민족주의를 한낱 고담준론(高談峻論)에 속하는 이념이나 의식구조쯤으로만 치부하였지, 그것이 민족 구성원 개개인의 일상생활이나 활동에서의 지침이며, 드러나는 구체적 생활모습이나 태도라는 것을 무시한 점이다. 일상생활과 활동에서의 지침과 구체적 생활모습이나 태도, 이것이 바로 민족주의의 중요한 보편적 가치이며, 상수적(常數的) 기능인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가치와 상수적 기능으로 인해 민족주의는 민족통일의 필수불가결의 이념일 뿐만 아니라, 통일담론의 철학적 기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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